1. 뿌리 찾기
2. 음산한 바람
3. 노비 시장
4. 반기
5. 몇 가닥 사랑의 방식...
6. 문둥이탈과 금화충
7. 최충헌과 책사 두두을
8. 삭풍의 계절
9. 매 사냥

 

<만적 2권>

     뿌리 찾기


 바람을 가르며 작은 표창이 시들어버린 풀숲에 박혔다.

"흠."

 마른 억새풀 사이에서 만적은 나자빠진 산토끼를 집어 올렸다. 갑자기 허기가 들었다. 긁어모은 마른 나뭇가지에 부시로 불을 붙이고 그는 품속에서 소금 한줌을 꺼냈다.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생각이 그때야 들었다.

 까치 한 마리가 깍깍대며 그의 머리 위를 날았다. 인가가 가까운 모양이었다. 그는 까치를 흘겨보고 나서, 막대기에 통째로 꿴 토끼를 불 위에 올렸다.

 

 동경을 떠난 지 나흘.

 이제 충청도 경계를 들어섰다고 가을걷이가 한창인 농부들이 말해 주었다.

 고기 익는 냄새와 연기가 나른한 피로가 몰려왔다. 태백산 암자를 나선 것이 한 이십 일 남짓 된 듯싶었다. 그는 소나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눈꺼풀에 저녁햇살이 어른대면서 여러 개의 무지개가 생겨났다.

 쉭, 쉭.

 본능적으로 뱀이지 싶어 몸을 튕겼는데, 어떻게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 다가왔는지 한 사내가 뱀 머리를 엄지손가락과 검지로 붙들고 바로 만적 앞에 서 있었다.

"헤헤헤! 요놈."

  팔 길이가 거의 엇비슷한 독사가 사내의 팔목을 칭칭 감아 올라갔다. 사내는 만적이 모닥불 앞에 앉아 있는 것을 개의치 않는 듯 순식간에 뱀 껍질을 훌렁 벗겨버렸다. 뱀은 금방 허연 백사가 되어 온몸을 뒤틀었다.

 사내는 만적을 못 본 듯이 허연 뱀을 위에서부터 쭉 손으로 훑어 내렸다. 그러자 뱀의 꽁지 쪽에서 작은 밤송이 같은 것 두 개가 튀어 나왔다.

"이것이 살무사 좆이여. 좆..."

 사내는 히죽 웃더니만 그걸 입으로 우드득 깨물어 목에 넘기고서야, 그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얼굴이 까맣고 눈빛이 몹시도 반짝거리는 사내였다.

"나무를 좀더 모아야겠구먼. 그랴."

 사내는 주섬주섬 나뭇가지를 끌어다 불 위에 놓고 불꽃이 좀 사위어 들자, 남은 토끼고기 곁에 허연 뱀을 나란히 걸쳐놓았다.

"소금 있남?"

 사내는 다시 헤헤 웃더니,

"이럴 때 화주가 있어야 궁합이 맞을 텐디....이것이 왕 살무사라, 물렸다 하면 일곱 걸음 못 가서 바로 극락이여. 해도 요것이 입으로 해서 뱃속으로 들어갔다 허면 몸엔 고만 인겨, 한 점 혀."

 뱀이 구워지자 그는 가운데 반 뚝 잘라 꼬리 쪽을 만적에게 내밀었다.

"구렁이덜은 말여, 좆이 두 개라 한번 붙었다 하면, 이거 한 개가 하루 낮씩이거덩. 요것이 교대로 그걸 혀 갖고는 하루 낮, 하루 밤을 붙는 게라. 이걸 날걸로 열 마리만 뜯었다, 허면....구렁이하고 똑같지는 못해도 반은 허지. 하루 낮은 계속허는 거여. 헤헤헤."

사내는 새까만 얼굴에 눈을 반짝거리면서 열심히 뱀살을 씹었다.

"먹지 뭘 그려? 체면 차릴 행색도 아니구먼, 씹을 때 잘 씹어. 살무사 가시란 것이 워낙 독혀서 잇몸에 박혔다 하면 그것도 황천문전이여. 그런디 이 산 속에는 웬일이여? 쫓기는 몸인감?"

"개경으로 가려고."

"개경? 건 왜?"

"찾을 사람이 있어서."

"계집 찾어 나섰구먼. 그럼 여기서 독사 좆이나 몇 개 더 먹고 가. 날걸로 열 마리만 묵었다 하면 뚝 소리 나는 거니께. 헌디....내 상(相)을 좀 볼 줄 아는 디말여, 암만해도 지금 바로 가서는 좋은 일보다는 궂은 일이 많겠구먼. 그러니께...."

사내는 작은 눈으로 만적을 빤히 쳐다보더니만 손가락으로 만적의 이마를 쿡 찔렀다.

"이것이 표여. 표."

 만적의 얼굴빛이 금방 변했다.

 이의민이 전에 칼로 그어 놓은 흉터였다. 만적의 일그러지는 표정 같은 것엔 관심도 없는 듯 뱀을 맛있게 다 먹고 나서 그는 다시 히죽 웃었다.

"다 속여도 내 눈은 못 속여. 나도 주인 놈 불알 걷어차서 병신 맨들어 놓고 튀어나온 놈이여. 과부 속은 과부가 아는 게여, 참 내 이름은 망이(亡伊)여. 망이…… 헤헤헤. 됐남?"

"망이?"

"어째 이름이 이상혀?"....홀애비 속 홀애비가 아는 거니께. 내 움막으로 가자구. 한 데서 서리맞는 것보다야 날 거여. 길 나서서는 쭉 한 대 잠이었겠구먼. 그런디, 그쪽도 이름이 뭐 있을 거 아녀?"

"만적이여."

"만적?"

"왜 이름이 이상해?"

 둘은 마주보고 훅 웃었다. 잠시 마음이 푸근히 놓였다.


"내 구렁이 얘기가 거짓말 같거들랑 직접 먹어 보면 알 거구먼. 늦가을 요새 짐승이 또 최고인 겨. 주인 치고 도망 온 놈, 남의 계집 덮치고 도망한 놈, 이 산 속으로 기어 든 놈들 만나면 구렁이 몇 마리씩 보신시켜 보냈구먼. 헤헤헤. 헌데 나이도 비슷한 거 같은 데 몇이여? 나는 스물 넷이구먼두."

 나이 같은 건 잊고 지낸 몇 해였다. 눈을 뜨면 무예, 무예였고, 더러 잠이 들지 않는 밤이면 골짜기에 버려진 노비들 시체와 분이와 매영이 생각을 가끔 했었다.

"스물 셋인가? 아마 그러는 성싶어."

"나보다 하나 밑이구먼. 일어서지. 산 속은 금시 추워지니께.... 헌디 아까 몸 날리는 것 보니께 한 가닥 하는 거 같던디, 내 눈은 못 속이니께....."

"도망 나왔다가 태백산에서 좋은 스승 만나 조금 배웠어."

"부럽구먼. 난 그저 한 가지 재주밖에 없는 디."

"무슨 재주길래?"

"후다닥 튀는 데는 날 따를 사람이 없어. 그래 내 별호가 바람이라고 바람, 전부터. 헤헤......"


 산길이야 만적 역시 뛰는 사슴을 따를 수 있었지만 망이의 걸음은 확실히 그에 못지 않게 빨랐다. 그것도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움직여서 땅을 전혀 밟지 않고 가는 듯싶었다.

"그래, 만적이는 무슨 무공을 익혔남?"

"이것저것……."

"난 튀는 재주말고, 구멍 후비는 재주도 보통은 넘어. 내가 먹은 구렁이 좆이 백 개는 넘거든. 헤헤헤. 그걸 알아야 혀."

"그것두 재주여?"

"암 재주지. 한꺼번에 서너 계집은 아침에 못 일어나게 허지. 헤헤헤. 이 산 속에서 양식을 뭘로 구하겠어? 곡식이다, 술이다, 부러울 것이 없구먼."

 골짜기를 거슬러 오르다가 후닥닥 풀숲을 뛰어나온 살쾡이 한 마리를 만적이 단검으로 쓰러뜨리자 망이는 작은 눈을 반짝이며 손바닥을 쳐댔다.

"아까 몸 날리는 거 보고 알긴 알었지만.... 거기다 말여. 구렁이로 보신을 조금만 해두면 말여. 어딜 가도 안 굶고 잘 살아 가겄어."

"구렁이 보신?"

"사내란 건 계집만 다룰 수 있으면 나머지는 다 굴러드는 게여. 아! 시험삼아 내 말만 들으라니.....구렁이란 것이 원래 영물이라 죽은 것, 더러운 것 입에 안대는 것만 봐도 알잖여? 말했지 안남? 한번 붙었다 하면 하룻밤 하루 낮을 계속 한다니께. 사내가 반만 그리 해봐. 세상이란 것이 언제고 계집 안 끼는 곳이 없는 디…… 그 재주만 있으면 죽을 자리에서 사는 수가 있고, 배고플 때 안 고플 수 있잖겄어?"

 

 망이의 움막은 바위틈에다 얼기설기 나무를 얽어 그 위를 풀로 덮은 반 움집이었다.

"여기서 한 십여 리 내려가면 집들이 있어. 거기 내려가면, 나 내려오기 눈 빠지게 기다리는 과부 년들이 수두룩 혀. 찬바람 불고하면 한숨께나 쉴거구먼."

 방문을 열자 지독한 비린내가 확 풍겼다. 뱀 냄새였다.

"저런 제미헐."

 투덜거리며 방안으로 들어가 집어드는 걸 보니 한 발도 넘어 보이는 누런 구렁이였다. 항아리 속에다 넣어 두었는데 빠져나왔나 보았다.

"첨엔 비린내가 나는 듯해도 이 구렁이 냄새가 다정해지기 시작하는 겨. 내 마누라 년도 며칠 지내고는 이 냄새가 구수하다고 하더라니깐."

"마누라?"

"언청이 계집년 하나 구해다 살았지. 한달 좀더 살다가 내뺐구먼. 그때는 그저 맨 날 한 우물만 팔 때라, 하룻밤에 대여섯 번씩 치마를 들추었드니만, 제 명에 못 죽지 싶어 튄 모양이여. 헤헤헤."

 모처럼 만적도 허리를 펴고 같이 웃었다.

"칠점사 끓여 놓은 게 있을 거구먼. 화주도 있고.... 내 이리 살아두 없는 것이 없어."

 망이는 만적을 암벽에 붙여 만든 방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는 부시럭거리며 질그릇 하나와 화주병을 내왔다.

"가만있어라, 이 놈들.....손님이 오셨으니....이거 한 마리 굽고, 끓여 놓은 것 데우고 해서 말여.... 이 황구렁이는 내가 한 해를 키운 거구먼."

"구렁이를 길러?"

"왜? 추야장(秋夜長) 긴긴밤 혼자 불두덩 움켜쥐고 잘라문 이놈들 쉭, 쉬익 우는 소리라도 들어야 잠이 들지, 잠이 오남? 죽은 거를 안 먹으니께. 쥐를 살려서 잡아다대느라고 속께나 태웠어."

 만적은 산에서도 뱀은 잡아먹지 않았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싶었다.

 칠점사를 데우고 구렁이를 가죽 벗겨 굽고, 토끼와 살쾡이 고기까지 볶아서 화주를 놓고 마주 앉으니 갑자기 부자가 된 듯싶어졌다.

 하기야 만적에게 언제 대등한 입장에서 정을 나눈 친구가 있었던가.

 친구라면 감마라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늘 감마라는 늘 한 발 앞서 있었다. 집을 튀어나올 때도 그랬고, 마라가 지닌 그 쇠붙이의 뜻을 알고 부터 만적 스스로도 늘 그런 자격지심이 들었다.

"구렁이를 끓이면 말여. 이렇게 기름을 말짱 걷어내고 먹어야 하는 거여."

 만적은 마음이 편해지면서 망이가 하는 언동이 점점 재미있어져서 참 오랜만에 히죽거리며 웃었다.

"배암 기름 마시면 아랫도리가 차게 되어서 계집들이 놀라거든. 헤헤헤! 어서 먹어. 쌀도 있고, 좁쌀도 있고, 걱정 없으니께."

 화주 탓이었는지 뱀 고기 맛도 괜찮았다.

 망이는 작은 눈을 빛내면서 억세게도 먹어댔다.

 옛날 곰노인 집 움막에서 억세게도 먹어대던 감마라같이.

"훌훌 단신인감?"

"어매는 나 어렸을 적 죽었고."

"종놈 신세 피붙이는 뭘 혀? 천민들은 혼자 몸이 제일 존 거여. 내가 왜 우리 주인 놈 불알을 걷어차고 도망 나온지 알어?"

"나는 친구 놈 송장 내다버리고 나서, 태백산으로 튀었어."

"송장?"

"사냥 나갔다 노루 몰이 잘못했다고 주인이 활로 쏘아 죽였지. 그 친구 송장을 버리러 갔다가....."

 그 도련님도 죽었고, 그 도련님 송장을 내 손으로 묻어 주었네, 그렇게 말하려다가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 죽은 놈 여동생이 동경 난리 통에 개경으로 팔려 갔다기에 그래도 한번은 만나야지 싶어서.... 감마라라는 친구는 앞서 서경으로 갔고."

"난 말여....그래도 애비, 어미 한방서 살았잖여? 헌디 주인 놈이 한밤중에 방문 앞에 와서 커음커음 하고 기침을 하는 거여. 애비는 끙 한번 목구멍소리를 하고 나서 에미를 한번 건너다보는 거여. 그때 에미 눈에 괸 눈물이 뵈어.... 그런 다음 주인 놈이 방안으로 기어 들어와선 에미한테 그 짓을 하는 거여."

"....."

"언뜻하면 몽둥이찜에다, 손발 작두에 잘린 놈들도 있는데, 어쩔 거여? 그저 자는 척 있을라문 웬 그리 물어대는 것들도 그리 많은지.... 한 일곱 살 되었었나? 주인 놈이 막 우리 에미 배 위에서 요동을 치는 참이었는데....하도 발등이 가려워서 벌떡 일어난 게 주인 발을 밟았구먼. 이튿날 애비가 안 죽을 만치 맞았어. 나만 머리 팔아버린다 했는데 팔려가긴 면했지만  다음부터는 밖에서 주인 놈이 커음커음 하면 내가 앞서 애비 꽁무니를 따라 밖으로 나왔어. 별도 총총하고 바람도 억세게 불었어.... 내가 물었구먼. 아부지, 주인 나리가 지금 뭘 하누? 구렁이 좆을 묵었단다. 구렁이 좆 말이여... 애비는 그러고는 가래침을 캑 뱉었어. 그래서 생각을 한 게여. 나도 커서 구렁이 좆을 수도 없이 많이 묵을 거다, 그렇게 말여. 한잔 들어. 커어, 술맛 좋은데…."

"소원 이루었네."

"애비, 에미 죽고나서, 그 주인 밑에서 종년 하나 하고 짝을 채웠지 않았남?... 한 열흘 같이 살았나. 사내 계집이란 게 그런 거구나, 열심히 우물을 파는데. 한 밤중에 이 주인 놈이 우리 방밖에서 커음커음 하더란 말여.... 옛날 에미 생각이 벌컥나는 거여. 꿈쩍 않고 자는 척했더니 머리도 허연 게 방안으로 들어서더니 바지부터 까내리는 거여. 그리고는 내 엉덩이를 걷어차는 거여. 나가라는 거겠지. 옛날 어매 얼굴이 푸르르 떠오르고…… 에라 모르겠다. 사람이 한번 죽지, 두 번 죽냐? 무릎팍으로 주인 놈 아랫도리를 힘대로 한번 내질렀더니만 윽 소리, 한번에 거꾸러지더먼. 그러고 나서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겠다고 마누라 년 손을 잡아끌었지. 그런디, 이 년이 뭐란 줄 알어? 헤헤헤. 한 잔 더 마셔야겠구먼."

"......."

"내 손을 뿌리치는 거여. 왜 자기 꺼정 끌어 들이냐는 거여."

 만적은 불현듯 분이를 떠올리며 확 불덩이가 목구멍을 치밀어오는 것을 삼켰다.  

 "만적 같았으면 그때 어찌 허겄어?"

  만적은 대꾸 없이 어금니를 물었다.

 몇 사람을 죽인다해서 없어질 일도 아닌 일....그 자신 김정의 시체까지도 묻어주지 않았던가.

 "만적이 그 이마빡 숭터 말여...."

 누구에게 붙잡힌다 해도 열이나 스물쯤은 겁날 것은 없었다. 그러나 태백산 속에 있는 동안에도 그의 노비 신분이 바뀐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만적은 두 손으로 제 머리칼을 움켜쥐고 했었다.


  이튿날 오후 늦어서야 둘은 움집을 빠져 나왔다.

 "뭘, 한두 마리, 꿩이나 그런 것으로 잡을 수 없겠남?"

  산마루로 올라온 망이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키들거리기 시작했다.

 "나야 살무사에 능구렁이 밖에 못 잡으니 안되겠구 말여."

 "배도 안 고픈데?"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거구먼."

 

 만적이 덤불을 향해 돌멩이 한 개를 던졌다.

 후드득 장끼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허!"

 망이가 무릎을 쳤다.

 날아오르던 꿩이 금방 만적의 표창에 맞아서 떨어진 거였다.

 "귀신의 경지여."

  다시 토끼 한 마리.

 "오늘밤 좋은 일 한번 해주자구. 좋아 할 거여. 튼실한 사내 하나 달구 가면."

 공물 바치기에 지친 양민들이 산 속으로 기어들어 화전을 일구며 숨어사는 마을이 있다고 했다.

 "계집만 둘 사는 집이 있거든, 시퍼런 나이, 서방 잃고.... 과부가 과부 속을 안다고 저희들 둘만 사는데 불쌍 들 허잖여?...나 허고 동서 한번 해 볼텨?"

 망이가 히힉 웃어댔다.

 "사람이란 게 이상한 거여.... 배가 좀 부르다, 해야 색(色)이 있는 거 아녀? 배가 너무 고파 봐. 더운 거, 찬 거가 어딨어? 마찬가지여. 사내 계집도."

 어스름이 덮여 가는 골짜기를 내려가면서 망이는 계속 혼자 히죽대었다.


  외따로 있는 게딱지같은 작은 집 한 채가 얼마 안 가서 눈에 띄었다.

 "여기는 말여. 누구 눈치 같은 거 안보고 사는 데여. 장작개비로 이빨을 쑤셔도... 그건 남의 일이여 홍시감을 불에 구어 먹어도... 그것도 남의 일이여."

 망이는 그렇게 말해 놓고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래도 말여. 사내 계집 만나서 허는 짓은 꼭 사람 안 보는 데서 하거든."

 망이는 또 히히힉 웃고 나더니, 그의 옷소매를 끌고 어스름이 덮여오는 억새풀지붕의 마당으로 끌어들였다. 그가 크음큼 기침을 했다.

"누구래?"

 작은 방문이 열리더니 머리칼이 부수수한 여자 하나가 마당으로 내려섰다.

 "하이고, 살모사 뼉다구 목에 걸려 칵 죽었나비다, 했구먼."

 만적이 곁에 있는 걸 못 보았는지, 여자는 쪼르르 뛰어나와 망이의 손부터 잡았다.

 "화주가 세월이 하도 지나 곰팡이 피었구먼두."

 "소금은 안 썩었남?"

 "지어놓은 좁쌀 밥에도 싹이 나왔다니께."

 "눈이란 게 보라고 뚫어진 거여."

  망이가 만적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때야 여자는 주춤거리면서 얼굴이 확 붉어졌다.

 "니년 들, 샛서방이여."

  계집이 키익 킥 웃고 나선,

 "워째, 비린 냄새가 난디야?"

 "뭐여.?"

 "비린 냄새 말여, 히히익."

 "처제 시집 보낼라고 내가 석 달 열흘, 헤매서 찾아낸 친구여, 친구. 이 삼한 땅에서 칼 솜씨 당할 사람이 없는 장수여....얼른 꿩하고 토끼 받지 않고?...."

  수세미 머리 여자가 만적 손에 들린 토끼와 꿩을 냉큼 받아 부엌으로 도망치듯 들어가 버렸다.

 "좋아서 입 찢어지는 거 봐.....그저 저리도 고픈 거여. 목마르고 몸이 고픈 거여."

 망이가 만적을 돌아다보았다.

 뱀을 찾아 나섰던 망이가 수세미머리 여자를 잔디밭에서 범했고, 흥건히 땀을 흘리고 난 여자가 그를 이 집으로 데려 오더니, 방으로 망이를 들여보내 놓고는, 잠시 후 같이 살던 더 젊은 여자를 그 방으로 들여보내더라는 이야기는 지난밤에 들었다.

 "서방 맛 알 만해서 괴질로 둘 다 서방을 잃었다느먼."

 여자도 여러 가지가 있지. 만적은 순간 그 생각을 했다. 한번 몸을 섞은 사내와의 인연으로 그 사내가 흙 속으로 돌아 갈 마지막 밤, 제 손가락 끝에 기름을 발라 불을 켜고, 다시 기름을 칠해 불을 켜며 밤을 지새우는 여자도 있고, 제 좋아하는 사내를 골라 훌훌 앞서 옷을 벗는 여자도 있지. 몸뚱이는 몸뚱이대로 아무 사내한테나 내던져 두고는 감고있는 눈꺼풀 속에 한 사내만을 그리는 여자도 있으리라.

 그들, 겨우 사내를 알만해서 서방 잃고 동병상련 의지해 사는 두 여자에게 색정은 그저 주림이었다. 즐기는 것도 방종도 아닌 목마름, 배고픔이었다.

 "우리 주인 놈같이 에미에다, 그 며느리, 커음 커음, 큰기침 한번으로 서방들을 방밖으로 내몰고, 그 짓 하는 것만 아니면 말여. 사내하고 계집, 만나서 할 짓이 뭐가 있어? 아, 길가다 배고프면 과실도 따먹고, 구렁이도 잡아먹는 건디...사내 계집은 음이고 양이어서 그게 천린(天理)게여, 천리."

 "죽은 남자 앞에서 제 손가락에다 기름 발라 불을 붙이고 다시 붙이는 여자를 보았어...."

 "고향 쌀뒤주에 쌀이 썩어가도 당장 먹을 끼니 없는 건 없는 거여."

 "그래도 나는 밥 생각이 없구먼…"

 

 만적은 슬그머니 사립 밖으로 나와 버렸다.

 가슴속으로 스스한 바람이 소리를 치며 달려가고 있었다.

"저건 숫총각이란 말여."

 망이의 낄낄거리는 소리가 바람이 되어 온몸으로 마구 달려갔다.

 "장가들라고 안 할게니 들어와 이거나 좀 먹어."

 망이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만적은 오던 길을 천천히 더듬었다.

 어쩐지 자꾸 눈물이 나올 듯싶어졌다.

 

  망이의 움막에서 이틀을 더 지내고 나서 만적은 떠나야겠다고 했다.

 "만적이야 무술이 있으니 찾는 계집 찾기야 허겄지...헌데 이 말은 헤어지면서나 할려구 했구먼....구렁이 좆이나 뜯어먹고, 불쌍한 계집들 잠 못 자는 거나 거들어 주려고 나, 산 속에 있지는 안혀. 내 말 알겠남?"

 "....."

 "이 산 속에 있으면서 만난 사람들이 참 많어.... 그러다 보니, 나 아니고도 불쌍한 천민들이 참 많이도 득실거린다. 절간 빈대새끼들같이 천민들이 참 많이도 있구나, 그걸 알게 된겨.... 여럿을 만났어. 망소이(亡小伊)라고 힘이 천하장사인 고향 놈도 만났구먼. 집채만한 바윗돌을 불끈 들어 내던지지..... 닭소리 잘 내는 놈, 개소리 잘 내는 놈, 계집 잘 후리는 놈, 줄타기 잘하는 놈. 벼라 별 놈들을 여기서 만나 가지고 내가 해줄 수 잇는 게 뭐여? 몸 보신으로 뱀 좆 먹여 보냈어. 뱀 좆 나눠먹은 놈끼리는 쉬이 안 잊힐 거 아녀?.... 만약에, 만약에 말여. 만에 하나, 이 뱀 좆 묵은 놈들이 같이 있다고 생각 해 봐..... 빗방울이 한 개 한 개 모이면 홍수가 되듯이.....내말 짐작되어?"

 "홍수?"

 만적도 가슴속이 훅 뜨거워 왔다.

 "빗방울 한 개는 작어. 참 작은 디...그것들이 합쳐져 홍수가 되어."

 "......"

 "팔려간 계집 하나, 찾아서 빼올 수는 있을 거여. 헌디, 그런 계집이 이 삼한 땅에 어디 한둘이여? 지 마누라, 주인 놈한테 맡기고, 동지섣달 설한풍, 삽작문 밖에 쭈그리고 앉어서 주인 놈 돌아가기 기다리는 종놈이 나 하날 꺼여? 워디?"

 노비의 무리들, 노비의 시체들 노비의 죽음들이 갑자기 구름처럼 뒤섞여 머릿속을 뒤끓어 왔다.

 "억울한 놈들, 불쌍한 놈들 맘을 합치면 사람도 홍수가 될거 아녀? 만적이를 처음 보고, 내 맘속 이 소리를 꼭 한번 하려니... 그래서 붙들었던 게여."

 망이의 눈빛이, 그 헤헤거리던 처음 눈빛과는 다르게 섬뜩섬뜩 만적의 가슴속으로 비수가 되어 파고들었다.

 마침 황혼이었다.

 불붙어 가는 저녁놀 속에 작달만한 키, 검은 얼굴의 망이의 모습이 점점 커다란 거인으로 변해갔다. 그 붉은빛 노을이 서서히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고구려의 도읍지였던 서경(西京:平壤).

 곧 눈발이라도 뿌릴 듯 으스스한 날씨인데도 성안 장터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말을 타고 지나는 무인들과 활과 화살 통을 멘 젊은이들도 눈에 자주 띄었다.

 빨간 댕기로 단장한 긴 머리를 오른쪽 어깨로 내려뜨린 젊은 여자들도 장터에 섞여서 저희들끼리 떠들어댔다.

 포장을 둘러치고 냉면을 파는 집. 보리 가루 부침과 화주를 파는 곳. 낫이며, 칼, 괭이들을 만드는 대장간, 떡집, 어물 집.

 "이 꿩들을 닭이라 우기는 미친놈도 있더라니.....허, 참."

 다리 묶인 닭들을 새끼줄로 말뚝에 매어놓고, 죽은 장끼 다섯 마리를 늘어놓은 닭장수가 노랑 수염에게 어느 손님 흉을 보고 있었다.

 "꿩고기 냉면 맛도 모르나, 그놈은?"

 "겉은 멀쩡하더라니....헌데, 이 꿩들을 닭이라는 게여, 닭....아, 옛날 수탉을 보고 '이것 봉황아니유?' 하는 놈이 있어서, 비싼 값에 판 사람이 있었다느먼....오늘은....."

 "아, 그럼 이 닭들을 꿩이라고 하고비 싸게 팔지, 그랬나?"

 "옛날 그 놈은 그 닭을 유수에게 봉황이라고 바쳤다는 거 아니여? ."

 "자네도 오늘, 관가에 끌려가 '네놈이 이 닭을 꿩이라고 팔았겠다?' 그래서 뺨 서너 대 더 맞고 받은 돈 몇 곱 물어주었으면 좋을 걸 그러지 않았나?...흐흐흐."

 노랑 수염의 사내가 음흉하게 웃었다.

 "사내놈을 계집이라고 판 놈도 안 잡혀가는데 내가 와 잡혀가?...사람 장사에 재미 붙이더니...그래, 낼은 몇이나 나온대나?"

 "한 열명."

 사내 둘이 낄낄 소리를 낮춰 웃는데,

 "그 닭, 한번 곱다. "

 닭 장수와 노랑 수염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앉은 젊은이가 죽은 장끼를 손가락으로 쿡 찔러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또 왔네. 이 사람?"

 "이 닭들이 하도 곱게 생겨서요."

 젊은이가 꿩 꼬리 하나를 뽑아들고는 기지개 한번을 켜더니 닭 장수 곁, 화주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니, 저런 놈이?"

 얼굴이 벌겋게 된 닭 장수가 푸르르 일어섰다.

 그러자 노랑 수염이 닭 장수에게 눈짓을 하고는 화주 집 포장을 휙 들추었다.

 젊은이가 화주 한 잔을 홀짝 마시고 난 후였다.

 "여기 술 잔 두 개만 더 주시구려.....제, 결례 용서하시고 이리 와서 한 잔씩 들 하십시다."

 젊은이는 새로 나온 잔에 화주를 채워 따르고는 노랑수염을 맞바라보았다.

 "서경 장터에서.... 이 노랑태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겐데…"

 젊은이의 눈이 다시 노랑수염의 두 눈과 맞부딪쳤다.

 "관에 나가면 벼슬이요, 시정에는 나이라는데... 초면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는 감마라라고 합니다."

 젊은이가 고개를 숙여 보이고, 은 조각 두 개를 술 따르는 아낙에게 건네주었다.

 "나, 노랑태나, 장터 뻐드렁니라면 이 바닥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소."

"첫 인사, 무례하게 했습니다."

 노랑수염이 술잔을 집었다.

 "도끼자루 썩는다고 아저씨네 거, 봉황새들, 다 날아가는 게 아닙니까?

 "날아가도 우리 집 오동나무에 앉아 있을 걸세."

  

 몇 잔씩 술이 돌자 감마라가 노랑수염의 직업으로 화제를 돌렸다.

 "사내가 계집이 되어 팔렸다면서요?"

 "우리 얘길 들었구먼…."

 노랑수염이 벌건 잇몸을 내놓고 끼르륵 웃더니 며칠 전 일을 꺼냈다.

 자기는 팔려나오는 노비들을 새 주인에게 맺어주는 거간 일을 더러 한다고 했다.  

 며칠 전 열 대여섯 살 된 사내종 하나가 계집애처럼 생겨서 장난삼아 여자 옷을 입혀 장으로 데려 왔다는 거였다. 그런데 어떤 영감이 덥석 계집애로 보고 데려갔다는 거였다.

"베 두 필을 더 얹어 주고 뒤도 안 돌아보고 데려 가버리니, 내 어떻게 하나?... 계집애다, 사내다, 나는 한마디도 안 했으니 잘못은 없는 게고."

  감마라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지만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진 못하였다.

 "헌데, 내 눈이 말일세...혹시.."

 노랑수염이 정색을 하고 감마라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잠깐 노랑수염의 눈에 이상한 안광이 서려 있었다.

 "왜 그러시는데요? 저야 그저 떠도는 유민입니다."

 "그리 보이지 않으니 하는 말이지."

 

 서경(西京).

 묘청의 반기 이후, 서경을 반골의 땅으로 여기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그것이 또 사람을 모으는 요인도 되어 무부나, 술사(術士)들이 서경 호족들 집을 찾아드는 일이 많았다.

 당시 반군 주모자급들은 처형을 받고, 혹은 성안에서 자결을 하기도 했지만 명종이 등극하고도 몇 년.

 서부인 특유의 자존심이 살아나고 있었다. 거기에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나자 무(武)에 대한 관심은 전국적이었다.

 "시장바닥에서 사람장사 천하게 하면서 사는 사람이네만 이 노랑태 의리 하나는 있네....사내를 계집으로 파는 건 파는 게고, 내 평소에도 이인(異人)을 만나 그대로 헤어지진 못하는 성미지."

  같이 들이킨 술 탓이었을까. 노랑 수염의 눈이 번쩍번쩍 빛을 발했다.

 "살인하고 도망 나온 죄수 같이 뵙니까?"

 "무슨 말을...."

 "무예 한 두어 가지, 어깨너머로 구경했지만... 그 뿐입니다."

  노랑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마라가 술잔이 놓인 두꺼운 나무탁자 위에 놓였던 손바닥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탁자 위에 손바닥 모양의 흔적이 희미하게 들어 났다. 노랑수염이 감마라의 손을 쥐었다.

 "우리 집으로 가세나. 첫눈에 무슨 인연이 있지 싶었네."


 노랑 수염네 집은 대동강이 내려다보이는 변두리였다. 집은 크지 않았지만 후원이 넓었다. 후원 한쪽, 젊은이가 하나가, 활쏘기 연습을 한참 하고 있었다.

 "선대로는 무부였네. 우리 집도..."

 "소문을 들었습니다."

 씨잉!

 씨잉!

 젊은이는 시위 당기는 데만 정신을 쏟고 있었다.

 "자제 분인가요?"

 "저희 조부 기질을 받았지 싶네, 저놈은."

 노랑수염이 자랑스러운 듯 잇몸을 또 내보였다.

 열 두어 개 화살이 다섯 대쯤은 중심 부근에, 나머지는 중심을 벗어나고 있었다.

 젊은이는 가볍게 읍을 해 보이고, 쏘았던 화살을 거두어 와서는 감마라를 힐끔 쳐다보았다.

 "대단한 솜씨인데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청년은 앞마당 쪽으로 나가버렸다.

 "어떤가? 내 자식 놈?"

 "때가 되면 갑옷을 입겠습니다."

 감마라가 젊은이가 두고 간 활과 화살 통을 집어들었다.

 "묘청 선사 때 이야기를 서경에 오면 들을 듯 싶어 무작정 서경으로 왔습니다."

 "날 찾아 보라던가?"

 감마라가 첫 화살을 시위에 끼웠다.

 한 대.

 두 대.

 석 대…

 시위를 언제 당겼나 싶게 휙휙 열 대의 화살이 무질서하게 과녁을 향해 날아갔다.

 보통 두세 대의 화살을 날릴 시간이었다. 열 대의 화살은 과녁 중심을 비켜 흩어져 꽂혔다.  잠시 화살이 날아가 꽂힌 과녁을 바라보던 노랑수염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중심을 비켜 멋대로 꽂힌 듯한 열 대의 화살. 그것들은 기묘하게도 마음 심(心)자를 사포 위에 붓으로 쓴 듯 정확히 만들어 놓고 있잖은가?

 "조부께 말로만 들은 신기(神技)를 내, 오늘에야 접했구먼."

 노랑수염은 과녁으로 뛰어갔다.

 화살은 사포를 덮은 판자 위에 똑같은 깊이에 가지런히 박혀 있었다.

 

 노랑수염의 이름은 박웅(朴雄)이라 했다.

 조부는 하급무관으로 당시 수비 업무를 맡았다가, 인종(仁宗) 13년, 서경성에 남아 경군과 대치하다 전사했고, 하급군졸이었던 아버지는 그 길로 군을 떠났다고 했다.

 "부친은 생전, 자식들에게 무예의 무(武)자도 입에 못 올리게 했네. 부친은 숯이나 굽고 한세상 살자고....."

 박웅이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벽장 속에서 한 자루 장검을 꺼내와 감마라 앞에 내보였다.

 "조부가 쓰시던 칼일세."

 손잡이가 은으로 장식된 장검을 뽑아들자 칼날에서 서늘한 검광이 뻗쳐올랐다.

 '天遣忠義'

 손잡이 바로 아래 칼날 시작되는 곳에 새겨져 있는 네 개의 글자. 천견충의.

 감마라의 얼굴빛이 잠시 해쓱해졌다.

 "어떤가? 이 칼?.....물려받은 농토도 없고, 숯 굽는 재주도 익히지 못해 나는 장사를 시작했네만..... 헛허허.....헌데 핏줄이란 게...."

 노랑수염은 저희 아들이 사라진 앞마당 쪽을 건너다보며 말을 더듬거렸다.

 "나야 살만큼 살아 여한 같은 것도 없는데....."

 감마라는 무릎걸음으로 노랑수염 앞으로 한 걸음 다가앉았다.

 "이 칼 글자의 뜻을 아시는 가요?"

  노랑수염은 그때야 검에 새겨진 글자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고개를 젓고 너털웃음을 웃었다.

 "나야 글을 배웠어야지."

 "이 칼....자칫 역신의 가솔로 화를 입을 수 있는 칼입니다. 한데…."

 스승에게서 들은 서경 이야기 속에 바로 이 '천견충의' 네 글자가 있었던 것이다.

 천도운동이 실패하면서 반란이 일어났고, '천견충의'는 그 반군에 가담한 서경군인을 일컫는 말이었다.

 '대위.천개'와 '천견충의'는 자주와 혁신을 내걸고 일어선 서경인의 상징이었다.

 "제가 나이 어리니 아저씨라 부르겠습니다."

 감마라가 벌떡 일어나 노랑수염에게 큰절을 올렸다.

 황황히 박웅이 손을 내저으며 감마라의 두 손을 마주 쥐었다. 

 "이 칼에 새겨진 글 뜻을 스승께 들었습니다. 묘청선사가 대화궁(大花宮)을 세우고, 새 나라를 만들려했을 때....."

  "부친도 장롱 속에 깊이 넣어두고 혼자만 몰래 꺼내보고 하셨네."

  "그런데 함부로 이걸 어찌 저에게 보이십니까?....이 감마라...베 육십 필 짜리, 도망 나온 노비입니다."

 노랑수염의 눈썹 끝이 꿈틀거렸지만 놀란 얼굴은 아니었다.

  "천민 출신 이의민이가 장수가 되어 내려가서, 풍지박산이 되었다고 들었지만 경상도 동경 땅에 김풍 장군 집이 있었지요. 이 감마라, 그 집 노비였습니다. 이마에 먹물을 뜬..... "

 "그래도 자네는 날 물어서 여기까지 찾아 왔지 않는가?"

 "시장 바닥 기웃대다가 아저씨 이야기를 들었지요.... 화통하고, 뼈대있는 분이라고.... 내 핏줄이 이 서경, 어딘가 닿아 있는 것 같은 짐작이 몇 년.... 그저 막연하게요... 좋은 스승 만나 무술 흉내 좀 익히고 나서는 죽을 때 죽지...그렇게 서경으로 무작정 왔습니다. 보살펴주던 노인이 죽으면서 ....잘못 역신의 후손으로 몰리면 목이 열 개라도 감당하지 못하리라 했습니다만..."

 감마라가 품속에 간직해 다니던 쇠붙이를 노랑수염 박웅의 눈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천개(天開), 그때의 연호이고, 이것이 국호 대위(大爲), 아저씨가 보관해온 칼의 '천견충의'는 당시 무사들을 이름하는 것이라 들었습니다."

 감마라의 눈 끝이 설풋 젖고 있었다.


 밤새 한잠도 못 이루고 이튿날 감마라는 일찍 길을 떠났다.

 "이 서경바닥은 내 손바닥이라니깐."

 전날 아들 원복(原福)에게 후원에서 활 쏘는 법을 가르쳐 주던 감마라는 박웅에게서 한 가닥 제 뿌리의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경군의 총공격으로 그때 죽지 않았으면 다 자결을 했다지 않은가?...그런데 대보산(大寶山)이라고 한 오륙십 리 길일 게야. 그 산 속, 그릇을 구우며 살고있는 노인이.... 나이는 모르고.... 그저 백옹(白翁)이라고 한다는데....그릇장수놈하고 이야기 끝에 그 노인, 한때 날리던 장수였는데, 그 난리 통에 살아 남았다는 말이 나왔구먼. "


 강궁(强弓) 하나에 화살 통 하나.

 홀가분하게 길을 나선 그의 걸음은 급한 마음만큼이나 빨랐다.

 마라는 노랑수염이 가르쳐준 대로 평양성을 나서서 곧장 서쪽을 향했다. 어쩌면 그 자신 뿌리의 실마리가 드러날지도 몰랐다..

 부모가 어떤 사람이고, 어디 묻혀 있나라도 알고 싶었다. 작은 쇠붙이하나. 그는 산길을 접어들면서 몇 번이고 그것을 손안에서 확인하였다.

  끼르룩 끼르룩.

  끼르룩 끼르룩

 계곡 물 한 움큼을 움켜 마시고 땀을 식히다가 그는 문득 하늘로 눈을 주었다.

 머리위로 기러기 네 마리가 묏산(山)자를 그리며 날고 있었다.

 그는 제일 뒤쪽의 기러기를 향해 숨을 들이쉬고 힘껏 활시위를 한번 당겼다. 보통사람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높이였고, 잡아당길 수 없는 강궁이었다.

  활을 내리기도 전, 뫼산 자의 기러기 떼가 흔들리는가 싶더니 그가 노렸던 기러기 한 마리가 작은 언덕 너머로 몸을 흔들며 떨어져 내렸다.

  그의 몸이 바람처럼 조그만 언덕을 치달아 올랐다.

  언덕을 올라 어림짐작으로 기러기를 찾던 그가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언덕 아래쪽에 오색 비단치장의 한 채 가마와 십여 명의 군졸들이 쉬고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기러기는 그 가마에서 십여 보 곁에 떨어져 내린 것 같았다.

 그는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돌아선다는 것도 내키지가 않았다.   그는 하늘을 보았다. 아직 정오도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혹 시비가 붙는다해도 그리 급하게 쫓길 시각은 아니었다.

 

 그는 천천히 가마 쪽을 향해 걸어 내려갔다.

 떨어진 기러기를 발견했는지 몇 명 군졸들이 가마 한쪽으로 몰리며 떠들고 있었다.

 활을 멘 그가 언덕을 내려가자 가마꾼 들과 군졸들 시선이 한꺼번에 그를 향해 몰려왔다.   그가 가마 곁까지 내려갔을 때는 기러기를 집어든 군졸들이 그를 둘러싸 버렸다.

 "그 기러기는 내가 쏜 겁니다. 돌려주시구려."

  기러기를 안고 있던 군졸이 제 동료들을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십여 명이 한꺼번에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남의 기러기를 내놓으라니 무례하기 그지없는 젊은이일세. 안 그런가? 다들."

  왓하하...하는 웃음이 바람소리처럼 일었다.

 "자네가 쏘았다는 증거라도 있는 겐가?"

 "술안주 하려고 기껏 우리가 잡은 걸 제것이라고 내놓으라니... 마른하늘 소낙비 오겠네."

 "그리 욕심나면 한 마리 못 드릴 것 없소만은 ……."

 감마라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끼르룩 끼르룩.

 끼르룩 끼르룩.

 그때 다섯 마리의 기러기가 또다시 바로 그들 머리맡을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이 최선이 아니다.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선의 병책이다.'(百戰百勝 非善之善者也 不戰而屈人之兵善之善者也). 스승 허정의 음성을 떠올리며 그의 활시위가 또 한번 튕겨 올랐다.

 강궁이 힘차게 화살을 일직선으로 날려 올렸다.

 "이것도 내가 잡은 게 아니라고 하지는 않겠지요?"

 제일 앞쪽을 날던 기러기가 가마에서 십여 보 자리에 다시 떨어져 내렸다.

 갑자기 순간 주위가 숨을 죽인 듯 조용해져 버렸다.

 감마라는 기러기가 떨어진 쪽으로 걸음을 옮겨 제 몸의 반이나 되는 기러기를 집어들었다. 화살은 턱에서 골수 쪽을 정확히 꿰뚫었다.

  감마라는 그때 비단휘장이 살며시 들리는 것을 보았다.

  군졸들과 가마꾼 들이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는 짧은 시간, 휘장이 반쯤 열리고, 젊은 여자의 얼굴이 드러난 것이다. 새까맣고 큰 눈이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놀라운 솜씨네요."

 여자는 맑은 목소리로 말하고 살풋 웃었다. 눈이 마주쳤다. 젊은 여자의 눈이 다시 감마라의 눈과 마주쳤다.

 "내가 기러기 고기를 워낙 좋아해서요."

 그녀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럼 이건 아가씨 몫으로 드리겠습니다."

 털썩 두 번째 잡은 기러기를 가마 곁에 떨구어주고 그는 그대로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군졸들이 뭐라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지만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빨리 했다.

  휘장 안의 여자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한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유난히 눈썹 윤곽이 까맣고 뚜렷한 젊은 여자였다. 그 눈과 마주치면서 그는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여보시오. 여보시오."

 언덕을 치달아 오르는 감마라의 뒤를 몇 사람이 뒤쫓아오는 듯했으나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뛰듯이 휭휭 산길을 내달아 갔다. 감마라는 숲길로 들어선 뒤에야 길게 숨을 내쉬고는 힘껏 허공을 향해 화살 한 대를 쏘아 올렸다.

 '여보시오. 여보시오.'

 뒤따라오던 목소리를 지우기라도 하듯 시위를 떠난 화살이 다시 씨잉 소리를 내며 까마득한 허공으로 사라져 올라갔다.

 나목(裸木)들 아래로는 낙엽들이 부수수하고 놀란 다람쥐들이 도토리를 줍다가 쪼르르 나무 위로 기어오르곤 했다.


  그릇 굽는 나지막한 흙 가마들이 서넛 보였을 때 그는 젊은 나무꾼 하나를 만났다. 지게 가득 통나무를 짊어지고 오던 중년의 사내는 그를 못 본 듯 그대로 그 곁을 지나쳤다.

  "말 좀 물읍시다. 혹시 백옹이라고 나이 드신 분 그릇 굽는 데가..."

  그러나 나무꾼은 귀가 먹었는지 묵묵부답 그대로 그를 지나쳐버렸다.

  골짜기는 흙 가마가 몇 개 뿐 인적이 없었다. 노랑수염 말로는 이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노라면 노인의 집이 있으리라 했다.

  그는 잠시 다리를 쉬며 장끼 두 마리를 잡았다.

  점심나절이 가까운 듯 해서 그거라도 구워먹을까 하는데 그는 다시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희끗희끗한 머리칼의 나무꾼이 한 사람 역시 땔나무를 한 짐 짊어지고 내려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만.... 그릇 굽는 곳이 여기 말고 다른 골짜기에 또 있는 가요?"

 "뉘를 찾으시오?"

  나무꾼은 지게를 세우더니 감마라의 아래위를 살폈다.

 "이 부근에 나이 많은 노인 한 분이 사신다고 해서요....."

 "노인이라 …."

 나무꾼은 그를 다시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더 위쪽을 가리켰다.

 "저 언덕을 넘어야 할 게요."

 "이거 한 마리는 아저씨 볶아 잡수세요."

  나무꾼은 고개를 흔들면서도 그가 건네준 장끼를 손으로 받아들었다.

 "허...봉황새 한 마리 품속으로 날아든 꿈을 꾸었더니...허허허, 참. 고맙게 받겠소. 헌데 젊은이는 어인 일로?"

  "그 노인께 꿩이나 한 마리 드리고 가려구요."

  "며칠 전, 그 영감 누가 올 것 같다고 산길을 내다보고 하더니만.."

  "누굴 기다리더라구요?"

  "아, 아니오. 어서 가 보시오."

  나무꾼은 손을 내졌더니 휭 하니 골짜기를 바쁘게 내려가 버렸다.

 

  나무꾼 말대로 언덕 하나를 또 넘어가자 조그만 초가 한 채가 그릇 굽는 흙 가마 곁에 엎드려 있었다.

 마당 한쪽에 고령토가 한 무더기 쌓여 있고, 한쪽으로 흙물을 가라앉히는 작은 못이 있었다. 초벌구이가 안된 붉은 빛 그릇들이 좁은 툇마루에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 골짜기에는 사냥감이 많지 않을 텐데."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센 노인 한 사람이 흙 가마 쪽으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읍을 하며 고개를 숙인 감마라를 힐끗 처다 본 노인은 툇마루에 놓인 꿩을 발견하고 꿩을 집어들었다.

 정확히 화살은 꿩 머리를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노인은 그가 멘 활을 눈여겨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힘으로는 다루지 못하는 강궁인 것을 알아챈 모양이다.

  노인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고개를 갸웃하더니만 성큼 그 앞으로 바싹 다가섰다.

 "원래 그릇 굽는 곳에서는 살생은 금물이다."

 "소생, 그저 모든 게 마음이라 배운 것만 생각하고...."

 "죽여놓고도 안 죽였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이라더냐?"

 "예?"

 "지고도 이겼다고 우기고, 이기고도 사실은 진 것이라 우기고....네 스승이란 자가 거짓말만 가르친 게로구나. 왜 내가 틀린 말을 했느냐? 헛허허."

 "제자된 자, 스승을 욕되게 해서는 아니 된다 앎니다만...."

 "그깟 땡땡이중이 무슨 사부님이야?"

 노인의 백발과 흰 수염 속에서 그 눈빛이 범접하지 못할 위엄으로 빛을 내고 있었다.

 "그 땡땡이중이 제자 하나는 훤칠하게 잘 생긴 놈을 두었구나. 허허허."

 이 노인이 사부님의 친구라니? 그는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꿇어앉아 노인에게 큰절을 올렸다.

 

 흙 냄새 풍기는 좁은 방안에 감마라는 노인을 향하여 꿇어앉았다.

 "그 땡땡이는 그런데 네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감마마라고 불러왔습니다."

 "감마라…감마라… 그건 너희 허정 사부가 지어준 것이냐?"

 "어렸을 때부터 그리 불려 왔습니다."

 "낮도깨비가 한 두어 번 다녀가면서…설핏 네놈 이야기를 했다. 너희 사부 별호가 낮도깨비지."

 노인이 설풋 웃었다. 그러나 그 눈은 감마라의 속마음까지 꿰뚫어 볼 듯 무섭게 빛을 발했다.

 "너희 낮도깨비 사부가 날 찾아 가라더냐?"

 "아닙니다."

 "그 친구는 늘 모든 게 인연이지. 헌데 맹랑한 놈이로군. 그래 내가 무슨 이야길 해주면 좋겠느냐?"

 감마라는 품속에 간직하고 다니던 쇠붙이를 꺼내 노인 앞에 공손히 바쳤다.

 그것을 받아든 노인의 눈이 그의 눈을 잠시 쏘아보았다.

 "불을 켜라."

  들기름 담긴 한지(韓紙) 심지에 불이 붙었다. 노인은 유심히 둥근 쇠붙이 둘레를 불 가까이에서 시선으로 더듬어 갔다. 그러다 한 순간 노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시선이 맞부딪쳤다.

 "이게 뭣이냐?"

 "대강 짐작은 하옵니다만."

 "이건, 이것은.....역적의 신표(信標)다."

 노인의 턱 끝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너희 사부, 나쁜 사람이다. 어찌 해서 이걸 버리도록 하지 않고...."

 "저를 낳아준 제 아비, 제 할애비가 누군가는 알아야겠다고... 지난 6년, 수백 번도 더 맹세를 했습니다."

 감마라의 음성에 활활 불이 붙고 있었다. 노인은 잠시 신음하고 나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게 네 손에 들어간 경로를 상세히 얘기해 보아라."

 감마라는 혹부리 노인 이야기를 했다. 그 임종 직전 부탁까지도.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노인의 수염 끝이 몇 번 경련을 일으켰다. 눈을 감고 있던 노인이 한숨을 한번 내쉬고 나서 소매 자락으로 불을 꺼버렸다.

  밖은 훤한 대낮인데도 방안은 다시 눅눅한 어둠에 휘감겨 버렸다.

 "차를 한잔 마시고 싶다. 너 가서 저 쪽 바위 밑 샘에서 물을 길러 오너라."

  노인이 방문을 열고 손가락으로 작은 언덕을 가리켰다.

 "바위틈에 샘이 있다. 장마 들 때나, 가뭄에나 물이 늘거나 주는 일이 없지. 너희 사부도 여길 오면 저 물을 길어다 차를 끓여 마신다."

 노인은 그가 물을 길러 왔을 대 청동화로에 불을 피워놓고 있었다.

 무어라고 형언하기 어려운 차 향기가 곧 방안에 가득 퍼져 들었다.

 "김응수(金應守)…김현근(金賢瑾)…김현근…들어본 적이 있느냐?"

 안개같이 은은한 차 향기 속에서 노인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네놈이 언제인가 날 찾아오리라 짐작은 했다. 내가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더 나을지....."

  은은하게 코끝에서 퍼져드는 차 향기 속에서 노인의 이야기는 점점 안개 속 같았다.

  초겨울 바람이 창문을 후렸다.

  "김현근… 그 김현근이는… 사십여 년 전, 나하고는 둘도 없던 친구였다."

  노인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음성은 떨렸고, 차를 마시면서도 목이 타는 듯이 보였다.

 

  바람이 창문을 자꾸만 후렸다.

 "잊지 않고 있다. 그 해 2월, 그 날 어지간히도 깊은 안개가 끼었다. 성(城) 바로 아래로 경군(京軍)이 쌓아올린 토산(土山) 높이가 여덟 길, 길이가 칠십여 길...... 그 토산 위에서 서경성을 향해 경군은 궁노(弓弩)며, 석포(石砲)를 쏘아댔다. 성루(城樓)가 무너져 내리고, 운제(雲梯:사다리), 충거(衝車)가 한꺼번에 성벽으로 다가들었다.” "......."

 "너 충(忠)과 역(逆)이 어찌 다른 것인지 아느냐?"

 "......."

 "세상일이란 천(天)과 지(地)와 인(人)이 합일되어야 이루어지는 것. ...결국 서경인 들은 반도(叛徒)로 몰려 그 안개 낀 저녁을 끝으로 큰 뜻을 펴보려던 꿈이 끝나고 말았다..... 김현근은 중랑장(中郞將), 나는 낭장이었다. 중랑장에서 한 계급을 오르면 장군이 된다. 철궁에, 쌍도끼, 중랑장 김현근이라면 서경 성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인물도 훤했고."

  반군들의 정부군에 대한 마지막 저항의 서경(西京).

  1년 전, 대장군 곽응소, 낭장 서정 등이 싸움의 대세가 기울자 묘청과 유황(柳晃)의 머리를 베어 그 목과 함께 조정에 죄를 청했었다. 그러나 투항한 장수들에게 큰칼이 씌워져 하옥되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서경 성안 군사들은 다시 개경군에 죽기로 맞서게 되었다.

 반군들에게는 그때 다른 선택의 길이 없었다.

"좁은 대동강 수로를 조수(潮水)도 모르고, 서해 해도로 거슬러 들어온 경군 오십여 척 병선이 썰물이 되어 꼼짝 못하게 되자, 서경군들이 작은 배에 섶을 싣고 가서 병선에 기름을 뿌려 불태운 것도 그때였다."

 노인의 음성이 떨렸다.

  

  그렇게 장장 1년 반.

  성(城)을 에워싼 정부군은 접전 대신 지루한 지연전으로 서경성을 외부와 서서히 단절시켜갔다.

  성(城)이 고립되어 갔다.

  한바탕 격전을 치르려던 반군들의 울분은 시간이 지나면서 굶주림으로 지쳐가다가 마침내 부녀자와 노약자를 내보내고, 동료들 시체까지 구워먹는 한계에 이르렀다.

  드디어 그 해 2월, 몹시도 안개가 심했던 밤, 한꺼번에 몰아닥친 정부군에 의해 남아 있던 서경군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전사하거나, 자결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서경 백성도 모두 과인의 적자... 주동자이외에는 피해를 입혀서는 아니 될 것이다.' 왕은 그렇게 명령을 내렸다고 했다. 그러나 싸움이란 살상이 생기고, 피 흘리는 동료들을 보면 물불을 안 가리는 무자비와 보복이 뒤엉키게 마련이다. 피 냄새는 새로운 피를 부르는 피의 제전이 된다.

  총지휘자 조광이 제 집에 불을 질러 가족들과 타 죽으면서, 성(城)은 아비규환 속에 무너져 내렸다.

  화염과 비명 속, 그때 청년 장수, 김현근이 핏발 선 눈으로 배경용을 찾았다.

 "자넨 노부모가 성밖에 계시네....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그래서?"

 "충(忠)과 역(逆)을 따질 그럴 겨를이 지금은 없네. 효 역시 충과 더불어 인륜의 근본... 시각이 급하네. 난…나는 부모가 안 계시지 않는가?"

 "날더러 그럼? ....."

 "지금 다투고 있을 시각이 없어.... 나,...난 알다시피 내 대(代)에 와서 이것 어린 사내 자식하나.....그게 끊기지만 않으면 지하에서 조상들을 뵈어도 용서를 하실 걸세."

 "......"

 "어린것이 살아남거든... 이걸...."

 대위(大爲), 천개(天開), 네 글자가 새겨진 쇠붙이 하나가 망연해 있는 백경용의 손에 쥐어졌다.

 그것이 백경용 낭장이 김현근 중낭장을 살아서 본 마지막이었다.

  

 드디어 정부군이 노도가 되어 밀려들고 성 전체가 미친 불길에 싸였을 때, 백경용은 무기를 버린 채, 친구 자식을 품에 안고 성벽 밑에 엎드려 있었다.

  친구 아들은 나이 겨우 여덟 살.

  이름은 김응수.

  새벽이 되면서 성밖이 조금 한적해진 틈을 타 백경용은 휘감겨 드는 안개를 헤치고, 집 골목까지 숨어들었다.

 서경성 화염을 뒤돌아보면서, 그는 노부모와 처, 아홉 살짜리 외동딸 낭이가 떨고 있을 집 골목으로 기어들었다.

 그러나 집안은 그대로 정적이었다.

 어둠 섞인 안개만이 집안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을 뿐 인기척이 없었다. 밤 안개, 그 새벽  안개 속에서 희끄무레하게 눈앞에 다가든 것. 그는 아이의 손을 놓고 마당 한 쪽. 늙은 감나무로 내달았다.

  아내가 혓바닥을 빼어 물고 감나무에 대롱대고 있었다. 아내는 싸늘하게 얼어 있었다.

  역신(逆臣)의 가속은 열에 아홉, 공사노비로 끌려가게 마련. 아내의 시신을 땅에 내려놓고 방안에 들어선 그는 나란히 숨져 있는 노부(老父)와 노모(老母)의 시신을 확인하고는 그 자리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러다가 잠시 고개를 들었다.

  친구의 아들, 김응수가 훌쩍이며 뜰 앞에 주저앉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널...널..어찌 한단 말이냐?"

  아이를 끌어안으며 부들부들 온몸을 떨고 있는 그 앞에 누군가가 쓰러지듯 부복하였다.

"주인 마님...."

 노복 혹부리가 아홉 살짜리 딸은 안은 채, 토방 아래서 기어 나오며 꺼억, 꺽 목구멍 안으로 울고 있었다.

 품속으로 기어든 딸과 친구 아들을 한꺼번에 안은 채, 그는 허공을 노려보았다.

 성 쪽에서는 화염과 안개를 뚫고 비명과 함성이 한없이 계속되었다. 안개만이 모든 것을 휘감고 있었다. 충(忠)과 역(亦)이 그 안개 속에 뒤섞여 흐느적댔다.

 "죽을 수도 없구나."

 노복 혹부리만 몸을 떨고 있는 주인 앞, 어둠 속에서 꺼이 꺼이 속울음을 울고 있었다.

 

 부모와 아내의 시신을 집과 함께 불태워버리고, 혹부리 노복과 함께 산 속으로 숨어들어 십여 년.

 누이와 동생으로 자라던 친구 아들, 김응수와 딸 낭이가 서러운 혼례를 치루었고, 1년이 지나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너희 할애비 모습이구나. 눈하며 입모습이……."

 역신 가솔들이 공사(公私) 노비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그들은 더 깊은 산 속, 산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딸은 아이를 낳고 시름시름 앓더니, 아이 젖도 제대로 못 먹이고 세상을 떴고, 아내가 죽자 사위는 혼이 나가서 말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날마다 허공을 쳐다보는 일이 많아졌다.

 어린 외손자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그는 자주 눈을 감았다.

 친구가 마지막 그의 손에 쥐어주었던 쇠붙이를 때로는 어린 아이 손에 놓아주기고 했다.

 "두 집 혈맥이 이제 어린 네 놈 하나한테 밖에 남아 있질 않구나. 그게 네 업이냐? 이놈아..."

 백경용은 생각들을 없애려고 지치도록 항아리를 빚어냈다.

 그러다 어느 날, 하릴없이 먼 산등성이를 바라보던 사위가 갑자기 흙 반죽을 시작하면서 눈빛이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계속해서 바깥 세상은 난세(亂世)였다. 각 지방에서 크고 작은 민란들이 끝도 없이 계속되었고, 어느 곳이나 없이 도적 떼가 들끓고, 국경을 자주 범하던 거란족들까지 서경 가까이 기어 들어와 민가를 약탈해 갔다.

  

  어느 날 거란족 화적 떼 한 무리가 골짜기를 기어들어 구워놓은 청자 그릇들을 휩쓸어가면서, 청자 그릇 위에 그림을 그리며 제 숙명을 살던 사위, 김응수를 집과 함께 불태워 버렸다. 허겁거리며 집으로 돌아온 백경용의 눈앞에서 마지막으로 지붕이 내려앉고 있었다.

 "떠나거라. 그 아이, 혹부리 네놈이 데리고 오랑캐 떼도적 없는 곳으로라도 떠나거라...나는..."

 백경용은 잿더미를 뒤져 감추어 두었던 장검을 찾아들고 머리를 산발한 채, 길길이 뛰기 시작했다.

 "내, 이 칼로 죽으리라.....원수를 갚고 내, 싸우다가 죽으리라."

  실성 해버린 장년 백경용이 잿더미가 된 산막을 뒤로하고, 도적의 무리를 쫓아 신들린 무당춤을 추듯 숲길 속으로 사라졌다.

 

 "사흘만에 그 원수의 무리들을 만났다. 사흘만에…"

 "앞에 간 김현근의 혼이 칼에 실렸던지....네 애비, 에미 혼이 실렸던지 그놈들 목이 꼭 강냉이 대 같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대장 놈, 간을 꺼내들고 산으로 돌아와 딸과 사위 무덤 앞에 놓고 나서야 혹부리가 양쪽 집 하나밖에 없는 혈육을 안고 어디로 갔는지 정신이 났다....그 쇠붙이와 아이가 혹부리와 함께 어디로 흘러갔는지 몇 년을 수소문도 했다. 내 경솔한 짓을 땅을 치고, 통탄도 했고....."

 감마라를 그윽이 쳐다보는 노인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네가 가진 그 쇠붙이 바퀴에 서른 한 번째가 비어 있을 것이다. 네 할애비 김현근 중낭장이 그렇게 결사대의 서른 한 번째 장수였다, 내가 서른 여섯 번 째...."

 "외 할아버님!"

 참고 있던 울음이 봇물처럼 터져 감마라는 노인 앞에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할아버님...얼마나 입에 올려보고 싶었던 가족의 호칭이었는가. 마라의 등을 토닥거리는 노인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감마라의 목덜미로 떨어져 내려앉았다.

 "네 스승에게서 네 놈 얘길 듣고 긴가 민가....앞서서 찾아보고도 싶었다.....허나 참았다. 기다렸지.... 이런 깊은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있게 네가 자라도록 기다렸어. 이런 한 서린 이야기를 듣고 길길이 네 놈이 가슴 쥐어뜯지 않을 만큼 큰 뒤에 보려고......"

 "할아버님."

 "네 성은 김(金)이다. 너희 조부는 서경 성안에서는 다 알던 의리 있던 무인, 김현근 중낭장,.... 너의 아비 응수는 오랑캐 놈들에게 비명(非命)에 갔지만, 심성 착한 예인(藝人)이었다."

 노인은 선반 위 청자항아리들을 둘러보았다.

 "네 애비가 섞어낸 저 비취색에는 한(恨)이 깊이깊이 녹아 있다. 칼이고, 창이고, 그런 것에 한번도 눈을 못 주게 했던 내 말뜻을 제 속으로 삭이다가 쌓인 한(限)만해도 "


  해가 뉘엿거리는 황혼.

  양지바른 언덕, 두 개의 작은 무덤 앞에 마라가 꿇어 엎드렸다.

  저녁 햇살이 무덤 앞에 놓인 작은 쇠붙이에 내려앉고 있었다.

 "아버님, 어머님."

  그토록 알고 싶었던 부모. 그의 어린 시절 비명에 세상을 뜬 부모의 무덤 앞에서 그는 생전 처음으로 아버지, 어머니를 입안으로 불렀다.

  그는 친구 만적을 잠시 생각했다.

  만적은 어렸을 때, 어미가 끌려가는 것만을 기억한다고 했다.

  아비가 무엇을 했는지는 알 길 없다던 만적에 비하면, 제 뿌리가 어디 닿아있는지 그것이라도 알게된 자신이 얼마나 다행인가, 철이 나면서 처음으로 마라는 눈물이 끝없기 흘러내리는 것을 그대로 두었다.

  

  노인은 어스름 덮이는 골짜기를 망연히 쏘아보고 있었다.

  40여 년 전의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듯 노인의 눈빛이 활활 불이 붙어갔다.

 "북쪽 오랑캐들은 네 아비뿐 아닌 이 고려 모든 백성의 원수니라.....같은 백성, 같은 형제를 개, 돼지로 여기는 놈들 역시 다 우리에게는 원수니라."

 "네, 할아버님."

 "이 주전자와 대접 색깔을 잘 보아라. 거기 그려 있는 그림도…"

 청자상감의 주전자와 대접하나를 노인이 마라 앞에 내밀었다.

 "색깔이 어떠냐?"

 "곱습니다."

  가을 하늘빛깔 같기도 하고 깊은 강물 속 어른대는 물빛 같기도 한, 그러면서도 그것들과는 다른 은근한 비취빛 위에는 난(蘭)이 그려 있었다. 주전자와 대접 위에도 뻗어나간 난 잎새가 너울거렸다.

  "이것도 자세히 보아라."

 노인은 다시 감마라 앞에 주둥이가 긴 병 하나를 내 보였다.

  그윽한 푸른빛. 보고 있는 사람이 그대로 빨려들어 갈 것 같은 신비한 푸른빛 바탕에도 역시 난초 꽃이었다. 활짝 핀 꽃가지 곁으로 막 꽃잎을 벌리려는 꽃봉오리를 단 꽃대 둘이 학처럼 목을 뽑고있었다.

  "이 빛깔은 아무나 낼 수 있는 색이 아니다. 송나라 장사치들이 고려에 와서 너도나도 탐내는 것이 청자들이지만 이토록 오묘한 비색(秘色)이 아무 때나 나오는 게 아니야....서럽고 억울한 혼이 녹고, 녹아들어 빚어낸 색이다."

 "……."

 "그릇 위에 그린 그림들이 이상하지 않느냐?"

 "전부 난초입니다."

 "네 애비, 김응수는 한사코 그렇게 난초만 그렸다."

  노인은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청동화로 위에서는 물이 끓고 있었다.

 "차가 마시고 싶구나."

 "예."

 한번도 얼굴을 그려보지 못한 아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손끝과 그 영혼이 응결된 그릇들이라 생각하니 감마라는 또다시 목구멍이 헉 막혀오고 눈앞이 흐려왔다.

 그는 조심스레 차를 따라 두 손으로 노인 앞에 내려놓았다.

 "이 푸른빛이 그냥 푸른빛이어서는 쓸모가 없는 게다. 혼을 빨아들여야 한다. 네 애비는 심약했지만 그래서 예인(藝人)이었다. 네 애비는 네 할애비의 한(恨)까지 이 속에다 다 쏟아 넣은 게야."

 "네 어미가 죽고 나서.... 네 애비는 청자 위에다 난초만을 그렸다. 네 애비는 그림에다 꽃 냄새까지 그려 넣으려 했던 듯 싶다....앞서 간 네 에미를 그려 넣고 싶었던 게야."

 "어머님을요?"

 "차를 들어라."

 찻잔을 들어올리자 문득 난초 향기가 청자자기에서 은은히 스며 나왔다. 코끝이 아닌 등줄기 부근으로 예리하고 섬뜩하게 스쳐 온몸에 퍼져드는 난 향기.....

 '아버님…'

 그는 마음속으로 한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를 불러 보았다.

 찻잔에 피어오르는 뿌연 김 속에서 세월을 건너뛰어 한 사람 젊은 도공의 모습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난초 꽃을 닮은 도공의 젊디젊은 아낙 모습도 뿌옇게 떠올라왔다.

 마라는 무의식중에 찻잔을 내려놓고 젊은 도공과 그의 젊은 아내를 두 손으로 붙들었다. 순간 손안에 매끄럽게 와 닿는 차디찬 감촉.

 "흐흑-."

  그는 결국 목이 긴 청자항아리를 두 손으로 안아들고 또 한번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 자신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쏟아내려 서늘한 비수가 되고, 살얼음이 되고, 먹구름과 소나기가 되어 그를 휘감아 들었다.

 "너희 애비는 예인이었다. 그리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었을 게다. 사람이란 육신에 상처를 입어도, 진흙탕에 빠져도 무엇에고 기대고, 바라고, 빨려들 수 있으면 살아가는 게다...... 너희 스승, 허정도 가슴 한 가운데 품은 너무 큰 지략 때문에 낮도깨비로 그렇게 살아가지만......젊은 날, 맺은 한 인연의 올을 못내 한(恨)으로 삭히며 그렇게 떠돌며 살지만.... 한 나라를 움켜쥘 만한 지략이 있는 사람도, 한 세상 흔적 없이 왔다가는 중생도 다, 마음을 붙들어 맬 것이 없으면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되기 마련이다."

 "......"

 "네 애비는 그릇을 구우며 한(恨)을 달랬지만... 네 할애비와 나는 무인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분명 얘기하지만 옛 서경성 봉기는 역(逆)이 아니었다. 알겠느냐?"

 "예."

 노인의 음성은 무겁게 떨리고 있었다.

 "이 장검을 보아라."

 노인이 벽장 속에서 장검 하나를 꺼내 그 앞에 밀어 놓았다.

 "이 칼은 오랑캐들 목만 자른 칼이다. 칼에도 혼(魂)이 있어 주인의 생각이 틀려 있으면 칼이 말을 안 듣는다."

 아버지 김응수가 빚었다는 청자그릇들을 조심스럽게 밀어놓고, 노인은 검을 뽑아 들었다. 써늘한 검광 속에 칼끝에서 초겨울바람이 윙윙 울면서 넘나들었다.

 손잡이에 양각된 '忠義' 두 글자가 선명하게 그의 눈앞에 확대되어 왔다.

 "이 칼날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두워오는 귀에도 그 날의 함성이 들려온다....불타던 서경성도 떠올라오고, 네 조부, 김현근의 그 불덩이 같던 눈빛도 떠올라오고, 너희 사부 허정의 너털웃음도 떠올라온다. 저 청자항아리들을 보고 있으면 네 애비, 에미, 얼굴이 떠오르듯 이 칼을 보면 젊은 날이 떠올라 온다. 오늘부터는 네가 지녀라."

 공손히 끓어 앉아 두 손으로 칼을 받는 마라의 귓속에 멀리서부터 무수한 소리들이 들려 왔다.

 "사내놈이 진흙에 난초 꽃만 그리고 있어야 했던 네 애비 서러움도 네가 벗겨주어야 하리라.'

 

 밖은 초겨울 어둠과 함께 써늘한 한기가 밀려오고 있었다.

 마당으로 나와 외할아버지에게 그가 익힌 몇 가지 무예를 보여주고 나서 마라는 작별을 고하며 무릎을 끓었다.

  "이 할애비.... 산 속에 살아있거니 마음 속 그 하나, 그것만 있어도 그리 서럽지는 않을 것이다."

 하룻밤이라도 곁에 모셔 밤을 새우고 싶었지만 노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 할애비 세상과 연을 끊은 지 사십여 년, 남은 여생, 네 애비가 다 못 구운 그릇을 구울 게다. 너는 할애비가 살아 있느니 그것으로 살아라....다만 무(武)라는 것이 기(技)요, 양(陽)이요, 화(火)이니, 양이 아무리 강해도 음에 닿으면 녹아들기 마련이고, 불길이 거세어도 물 속에 들면 무(無)가 되는 이치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조화시키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 무엇인지 늘 생각해야 한다."


 훈훈히 타오르는 가슴으로 그는 천천히 골짜기를 걸어 내려왔다.

 말라버린 골짜기의 물줄기, 잎을 떨군 나무들, 쌓인 낙엽, 그 모두가 세상에 나와 오늘 처음 보는 것같이 새롭게 살아나서 움직이고 눈짓하고 수런거리는 것을 마라는 새삼 놀라워하면서 눈여겨보았다.

 모든 것이 전혀 다르고 새롭게 가슴 안으로 다가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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