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는글

2. 안개 골짜기 저편
3. 금소예
4. 산 사람들
5. 인연의 질긴 끈 하나
6. 쑥과 마늘의 시간
7. 거친 바람 불고
8. 사랑의 빛깔

 

<만적 1권>

   여는글 - 금소예(琴蕭隸),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

 


 멧돼지 간(肝)을 화주(火酒)에 곁들여 날로 씹고 있는 소예, 당신에게서 야생동물 냄새가 납니다.

 골짜기와 계곡을 뛰어 달릴 때, 당신에게서는 깊은 산 풀꽃의 체취....,한 겨울 내려 쌓인 눈밭 위, 가죽옷을 벗어 팽개친 당신 어깨를 타고 눈발들이 이슬같이 미끄러져 내리는 것을  봅니다.

 불과 얼음.

 사랑했던 사내 시신 앞에 꿇어앉아 손가락 끝에 불을 붙이고, 다시 기름을 발라 불을 붙이는 소지공양(燒指供養), 당신의 사랑을 나는 젊은 날부터 참 오랜 세월 지켜보았던 듯 싶습니다.

 당신이 새끼손가락 끝에 불을 붙이며 꿇어앉은 동굴 밖으로 그때 쏟아져 내리던 빗줄기와 바람소리를 나는 지금도 듣고 있습니다.


 高麗史節要 14券 神宗靖孝大王 元年에 기록된

<....私?萬積, 味助伊, 延福, 成福, 小三, 孝三 等 六人, 樵于北山, 招集公私奴隷, 謀曰: "國家,自庚癸以來, 朱紫多起於賤隷, 將相 寧有種乎, 時來則亦可爲也, 吾輩安能勞筋苦骨, 困於?楚之下, 諸奴皆然之 乃剪黃紙數千, 皆鈒丁字爲識, 約以甲寅, 聚興國寺....."..... 以告忠憲, 逐捕萬積等百與人, 投之江.....>

 이 몇 줄로 외로운 사내, 만적(萬積)을 만나면서, 고뇌와 분노, 그의 침묵의 행간에서 나는 뜻밖에도 원시의 순수, 처연한 사랑의, 소예, 당신을 만났습니다.

 당신은 넘쳐나는 용암이고, 천년설(千年雪), 서늘한 냉기였습니다.

 

 어차피 800여년 전, 1896년 초여름의 그 날, 바윗돌에 묶여 예성강 강바닥에 가라앉은 만적의 생애를, 그 1170년대에서 1190년대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이 가능한 일도 아니고, 그러한 시도로 컴퓨터 앞에 앉지도 않았습니다.

 신종(神宗)원년, 최충헌(崔忠獻)의 집권시절, 만적의 저항은 100여명의 수장(水葬)으로 끝난 매몰된 패배의 역사, 한 페이지일 수도 있습니다.

 세밀한 계획 없는 무모한 분노와 열정이 만든 그 좌절에 대한 연민도 아닙니다..

 만적의 깊은 영혼에 자리했던 그 원초적 자유에 대한 갈망, 세월과 상관없이 순치되지 않는 생명력과 조우하는 동안, 그 곁에 금소예, 당신이 있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조건에서도 억압은 침묵과 복종으로 위장되지만, 그 자유에 대한 꿈은 지하수나 용암 같은 것이어서 깊은 곳으로 흐르고 흐르다가 한 순간 지표로 솟아오릅니다.

 역사의 저편, 그 휴화산의 침묵, 보세요, 3.1운동 때도, 광주항쟁 때도 만적은 우리 곁에 살아 있었습니다.

 로마의 콜로세움, 무너져 내린 돌 담 사이에서도, 몽골 초원의 보랏빛 지츠꽃 사이에서도, 치첸이사, 저물어 가는 마야문명 석주(石柱)사이에서도 나는 만적의 그림자를 보았습니다.

 일요일이면 가끔 찾는 가까운 작은 절, 선법사(善法寺), 석간수 곁, 보물 981호의 1,000년 넘은 마애불(磨崖佛) 곁에서도 나는 만적의 냄새를 맡았으니까요. 

 

 만적이 우리 곁에 살아 있듯, 불임과 거세의 시대, 사막화되어 가는 우리 가슴 한 쪽, 손가락 끝에 불을 붙이는 소예, 당신의 원시적 생명력은 꿈인 듯 살아 있습니다.

 역사의 기록에 토를 달기 위해 책상 앞에 앉은 것이 아닙니다.

 공상적 무협의 소일거리를 제공하겠다는 생각 역시 없습니다.

 몇 줄, 역사의 그 행간, 순치되지 않는 영혼에 대해서, 소예 당신의 그 야생의 순수한 체취를 이 불모의 세월 속에 잠시 공유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금소예(琴蕭隸), 우리가 만적을 만나는 동안 당신 역시 우리 곁에 머물 것이라는 믿음으로 오늘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산 짐승으로, 풀꽃으로, 얼음과 불꽃으로 당신이 우리 곁에 남아있을 것을 믿습니다.


‘이유’ 출판사의 채근이 아니었으면 금소예, 당신과 만적을 만나는 일이 미루어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정숙미씨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2004. 여름 유금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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