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소설 권두언 (05.12)>

겨울을 앞두고 동업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2005년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 ‘엔터코리아(Enter Korea)`의 기치아래 주빈국으로의 위상이 돋보였다는 신문기사가 우리를 잠시 뿌듯하게 합니다.

  구텐베르크의 성경보다 훨씬 앞선 1337년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로 인쇄된 ‘직지심경(直指心經)`도 그렇지만, 전시된 ‘한국의 책 100'을 단말기로 내려 받아 그 자리에서 출력, 책으로 인쇄해내는 과정에 관람객들이 IT강국의 출판미래에 찬사를 보냈다는 소식에 우쭐해지기도 합니다.

  노벨 문학상 심사위원회에서 한국문인이 거론되었다는 미확인 소식 역시 우리를 흐뭇하게 합니다.

 

  그런데도 가끔 만나는 동업자들 얼굴에는 여전히 구름이 끼어 있습니다.

  출판관계자들이 거리에서 먼발치로 소설가가 보이면 골목으로 몸을 피한다는 좀 과장되었겠지만 그런 화제에 금방 우리는 다 우울한 기분이 됩니다.

   출판사에서 선인세(先印稅) 맡겨두고 원고 독촉한다는 이야기가 이제 전설이라는 동업자들의 푸념에 갑자기 기온이 더 내려간 듯 싶어집니다.

  하기야 한국에 소설가 다섯 명이면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좀 팔린다는 어느 동업자의 발언에 울컥해놓고도 우리는 대부분 쓸쓸한 자조의 침묵을 했습니다.

 

  근대문학 초창기의 선배 소설가들은 행복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봅니다.

  경제적 궁핍이야 비슷했겠지만, 적어도 선비로의 자긍심, 선구자적 자존과 정신적 우월성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천민자본주의, 모든 게 물신화되어버린 이 세태 속에 덫에 걸린 짐승처럼 운명으로 소설이라는 것을 붙들고 있는 대부분의 동업자들이 느끼는 이 상대적 박탈감은 차가워지는 날씨만큼이나 쓸쓸합니다.


   다양한 정보매체와 가치의 다원화에 이제 소설은 정신세계의 중심이나, 영혼의 구원, 오락적 기능의 자리에서도 밀려나 있는 듯 싶습니다. 책을 읽는 독자라 해도 소설을 통해 삶의 깊은 비의를 엿보고, 지적 호기심이나, 도덕적 자각을 얻는 사람은 없는 듯 합니다.

 

   책이 좀 팔리던 시절에도 우리는 문학이 한 조각의 빵이라도 될 수 있는가, 억울하게 죽고, 다치고 갇혀 있는 사람에게 한 끼의 사식(私食)이라도 될 수 있는가의 회의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온 몸에 시너를 뿌리고 불타버린 청춘들의 젊은 열정 앞에 우리가 쓰는 소설의 의미를 곱씹다가 펜을 던져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작업이 인간의 근원적인 영혼에 뿌리를 내리고, 감동으로 세계를 서서히 변모시키는 것이라는 생각, 눈앞의 현실과 직접적 투쟁이 문학의 본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소설가라는 명칭이 부담스럽고, 동업자들과의 모임도 공허감이 들어 문학에 관계되는 모든 것에서 멀어지고 싶은 충동도 우리는 겪으면서 지냈습니다.


   그런데도 소설 쓰기를 내던져 버릴 수도 없는 그 숙명성에 우리의 비극이 있습니다. 읽는 사람이 적어도, 어차피 써야하는 강신무(降神巫)의 운명이라면 그러나 어떻게 하겠어요?

  폭력과 억압, 인연, 일상, 존재 자체도 폭압이 되어 거기 맞서 쓸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소설은 업이며, 역마살입니다. 아픔과 상처의 앙금, 분노와 회의의 편린들, 강물이 흘러가도 사금(砂金)으로 남는 꿈과 사랑과 이별과 절망의 조각들을 안고 있는 우리는 자신의 구원 때문에라도 쓸 수밖에 없습니다.

  시대와 환경, 혹은 극히 개인적 고통과 참담한 상처의 잔해까지도 소설가에게는 재산이라고 생각하면 우리의 겨울이 조금 덜 쓸쓸할지 모르겠습니다. 


    언어 예술만이 갖는 무한한 지평과 상상력의 세계가 오늘의 부박한 현대문명에 대한 반작용으로 독자들의 심성 속에 다시 살아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마십시다.

  문학의 불안한 미래, 소설의 죽음에 대한 예감이 팽배해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오히려 우리는 소설의 확장을 꿈꾸고 믿으면서 동업자들의 외로움도 같이 보듬고 싸안는 그런 겨울을 맞으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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