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정순씨’와 ‘옛 로망스’의 거리

 

                                                           -main charater를 통해 본 작가의식의 변모

 

1. 프롤로그

 

 한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한 접근 방법은 어차피 독자 개개인의 컬러 필터일 수밖에 없다. 객관적 접근을 염두에 둔 독서방법의 새로운 시도들이 여전히 또 다른 오류의 가능성 앞에 놓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 ‘의도의 오류’라는 불명예 판정을 받았던 생트 뵈브(Saint Beuve 1804-1869)의 ‘그 나무에 그 열매’라는 명제가 다시 일정 부분 그 역할이 인정되고, 작품을 객관적 언어구조물로 파악하려던 형식주의 내지 구조주의도 자체의 ‘소모적 오류’의 늪을 경험했고, 객관적 척도의 작품재단 역시 ‘근원적 오류’라는 한계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 독자가 선입견 없이 완전히 의식을 비운 상태에서 작가의 모든 작품에 접근, 작가의식에 동화하는 조르즈 풀레(Georges Pouet 1902-1991)식 독서 방법은 나름대로 하나의 출구로 보인다. 작가의 여러 작품에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이미지나 특색, 분위기를 통해 확인해보는 작가의 ‘선의식(先意識)과 독자의식의 동화(同化)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는 또 별개의 문제이다.

 작품 외적상황에 의존도가 높은 생트 뵈브의 방법론이나, 작품 하나, 하나를 독립개체로 파악하는 ‘소모적 오류’의 폐해보다는 한 작가의 세계를 종합적, 통시적으로 관찰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1976년 단편 ‘하얀 역류’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문단에 나온 후 왕성한 작품 출간을 해 온 30년의 우선덕 소설 전체에 이 방법의 접근이 제한된 이 지면에서는 물론 가능하지 않다.

 다음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그는 30년 간 대단한 량의 작업을 해 왔다.


 장편 ‘가브리엘의 침대’(1978)

 장편 ‘서서 자는 나무들’(1982)

 장편 ‘살아 있는 산’(1987)

 장편 ‘이브 수첩’(1988)

 장편 ‘그대 떠나는 날 잎이 지는가’(2권. 1990)

 장편 ‘이제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전3권. 1991)

 장편 ‘연인의 아침’(전2권. 1991)

 장편 ‘슬픈 세시리아’(전2권.1991)

 장편 ‘하얀 여자’(전3권. 1992)

 장편 ‘여왕을 위하여’(전3권. 1993)

 장편 ‘너에게 할 말이 있다’(전2권. 1993)

 장편 ‘이 여자가 꿈꾸는 아침’(전4권. 1994)

 장편 ‘그대는 없고 그대의 껍질’(전3권. 1995)

 장편 ‘내 영혼의 푸른 가시’(1998)

 장편 ‘오래된 눈물’(전2권. 2001)


 여기 보이는 것처럼 우선덕은 한 시기 장편소설만 30권을 출간 했고, 1992년에는 꽁트집 ‘에고, 술이 웬수로다’를 출간했다.

 이 과정 속에서 단편소설집 ‘굿바이 정순씨’(1989, 주식회사 書堂)와 ‘옛 로망스’(2003.12. 민음사)두 권이 상당한 시차를 보이면서 출간되었다.


 우선덕 소설의 총체적 접근이라면 꽁트집을 제외하고도 30권의 장편과 단편집 ‘굿바이 정순씨’에 수록된 15편, ‘옛 로망스’에 수록된 9편의 단편전체를 종합적으로 선입견 없이 살펴야만 포괄적인 생의 인식과 특질, 작품의 숨은 비밀과 아름다움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적 출판시장의 장편 출간과 단편 발표의 층위의 문제, 동일 척도 비교의 무리함, 그 방대함 때문에 본고에서는 30년간의 작업 중 2권의 소설집에 수록된 24편의 단편소설 속 main charater에 한정, 논의를 진행시키고자 한다.

 일반적 단편의 특성인 완성도나 접근의 편의성이 이유이지만 장편에 대한 논의는 다른 시각에서 다루어질 기회가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 출발점에 있는 1976년의 ‘하얀 역류’ 의 특색과 변모는 우선덕의 작가의식의 일면을 확인시켜주고, 두 단편집 발간, 14년의 시차 역시 작가의 인간과 세계 인식 변모 추적에 하나의 단서를 제공해줄 것으로 믿는다.



2. main charater의 특성과 변모


 최근 소설 양식의 변화와 실험에서 소위 ‘작가의 죽음’에 이어, ‘주인공의 죽음’이 논의되면서 주인공의 증발 현상도 일부 보이지만 아직은 실험 수준일 뿐. 전통적 소설양식에서 main charater의 비중은 거역할 수가 없다.

 삶과 세계에 대한 구체적 양식으로의 소설에서 소설의 핵은 여전히 작품 중심에 있는 인물이다. 또한 인물의 행위와 사고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작가의식에 연결되어 있어 단적으로 작품 속 등장인물은 작가의 분신일 수밖에 없다.

 작가가 창조해낸 인물은 작가의식의 편린이어서 인물에 대한 추적은 그 작가의 의식에 도달하는 가까운 통로이다.


 그렇다면 그의 데뷔작 ‘하얀 역류’(1976)의 인물은 어떤가.

 과거 임신중절 경험이 있는 젊은 여성화자가 크리스마스 날, 또 임신 중절을 끝내고 사내 등에 업혀 눈을 맞는 산뜻한 수채화 같은 이 소설의 charater에 일단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작품의 구조적 완성도나 ‘정으로 한 끌 한 끌 쪼은 듯, 어떠한 소재라도 작품화할 수 있게 정갈하고 밀도 있는 문장력’(당시 안수길, 손소희 심사평)등의 작품 평가는 논외로 20대 초반, 여성 화자가 주인공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를 안 날부터, 그가 원하는 대로, 그리고 내가 어린 날 꿈꾸던 대로 살려고 했다.

  새로 시작하고 싶었다. 그것이 실패였다면 지금부터 또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오뚝이처럼 일어나고 싶었다. 어느 날 나는 환한 거리를 눈부시게 걷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녕을 하자. 축축하게 발끝부터 눈물이 올라왔다.

  그가 갑자기 고함을 쳤다.

   ‘이 바보야, 그런 걸 뭣 하러 말 하냐?’

  무어라 할 틈도 없게 나는 난폭하게 일으켜졌다.

                                     (‘하얀 역류’ 굿바이 정순씨 p43)   


 아이를 가진 일, 중절수술 역시 처음이 아니라는 여자의 고백에 남자는 고함을 치면서 제 목도리를 풀어 여자에게 한 겹, 한 겹 감아주고, 여자를 업은 채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의 밤거리를 걸어간다.

 과거를 뱉어내어 버린 여자가 남자 등에서 달콤한 잠 속에 빠져드는 소설의 결말은 아름답다.

 남자가 등을 돌릴 수도 있는 개연성에도 과거를 털어 버리는 여자나, 그 고백에도 여자를 감싸 안는 그들 어깨 위로 뿌리는 크리스마스 밤거리의 눈은 푸근하다.

 보수적 기준의 타락으로도 영혼이 맑은 여자 곁의 남자는 선량하고 가난한 청년 이외에 이름조차 없다. 전에 그녀를 임신시킨 사내 역시 이름이나 신분이 없다.

 그래서 이 ‘하얀 역류’의 두 남자는 그림자다. 여자를 효과적으로 형상화시키는 배경이며 안개일 뿐이다.


 영웅상실, 영웅부재의 현대적 삶을 담은 소설에서 발견되는 이 이미지가 우선덕의 데뷔작에 나타나 보이는 것은 중요하다. 이 허깨비로의 남성상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면서 이 출발이 그 후, 두 권의 단편 속 인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1)남성 거세의 세계


 그의 첫 소설집<굿바이 정순씨, 1989>에서는 ‘하얀 역류’를 제외한 14편의 작품들을 일별했을 때, 등장인물 중 남성이 아예 제외되었거나, 남성상을 상실한 거세된 남성 들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발견한다.

 14편 중 ‘꽃’, ‘비법’, ‘생일’, ‘작은 평화’, ‘찔레꽃,’ ‘굿바이 정순씨’ 6편에서는 아예 남성 인물이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실험적 서술 방식을 택한 ‘새’시리즈 3편, ‘새’, ‘새2’, ‘새3’에서도 여성 화자의 의식상황을 드러내는 대상물과 배경으로 남자가 등장할 뿐 주체적 동적 존재가 되지 못한다.

 ‘선택’에서는 결혼 10년 차, 주부의 ‘자기 찾기의 심리적 방황’을 부각시키는 배경으로 남편과 ‘장박사’가 배치되어 피상적, 상투적인 대치조건일 뿐 역동성이 부여되어 있지 않다.  

 ‘비누방울’의 남편도 소설 전체구조 속에 허깨비 같기는 마찬가지다. 아이를 원하는 시댁 분위기에서 임신한 화자의 심리적 반응 속에서조차 남편은 젊은 날 불장난으로 가졌던 화자의 임신과 중절의 기억보다 더 무게를 가지고 있지 않다.


  “화면을 봐 주세요. 보입니까? 부인?”

   그녀는 초음파검사기의 화면을 바라보았다.

  “태아가 보이지요?”

      ..................

      ....................

  그녀는 어린 날의 물고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작고 앙증맞은 공기 주머니. 친구들과 호호 불어 날리던 꼬마 풍선, 또는 밀짚 끝의 비누 방울, 비누 방울의 얇고 매끄러운 표면에 가득하던 무지개....

       ........

   그녀는 무지개도 보았다. 천진했던 다섯 살, 여섯 살, 일곱 살, 아홉 살...그 유년의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그녀는 화면을 향해 용감하게 집게손가락을 뻗었다.

    “낳을 거예요. 선생님. 난 저 비누 방울을 갖겠어요.”

   몹시 이상한 눈초리로 의사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갖겠어요.”

   그녀의 음성은 단호했다.

                        (‘비누방울’ 굿바이 정순씨 pp190-192)


 데뷔작을 뺀 14편 중 화자와 대립구도의 자리에 있지만 남성이 main character로 처리되고 있는 작품이 ‘실감기’, ‘풀’, ‘彎月’ 3편이다.

 그러나 이 3편 소설 속 남성들 역시 이미 ‘남성’을 지난 ‘아버지’이다.

 그들에게는 수컷의 냄새가 없다.

 설정된 나이에서만이 아니라, 그들의 사고와 행동 양식, 추억에서도 사내의 체취, 도전이나 투지, 현실적응 능력이 보이지 않는다.

 왜 그에게 ‘남성’이 강렬한 사랑과 섹스의 대상이나 카리스마를 지니지 못한 무기력한 ‘아버지’만으로 고착되어 있는 것일까.    


 ‘실감기’의 ‘아버지’는 20년 전 아내와 남남으로 갈라져 혼자 산 속에서 현실감 없이 그림을 그리며 지내다 병원에 실려 간다. 떨어져 있는 ‘어머니’의 감정도 외형적으로 ‘여성성’보다는 근원적 ‘모성’으로 설정되어 있다.

 비슷한 구조의 ‘彎月’ 속의 ‘아버지’ 도 아내와 딸이 있는 현실 공간에서 한 걸음 비켜 선 채 자기세계 속에 침잠해서 그림을 그리다가 혼자 죽는다.

 ‘풀’에서도 그 기본 구조는 마찬가지이다. 딸 ‘정자’가 ‘어머니’ 역할을 대행하고 있는 것이 다를 뿐 ‘아버지’는 그냥 그림자 같은 존재이다. 


 데뷔작을 포함, 우선덕의 초기 15편 소설에서 남성거세, 남성부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소설이 거대한 사회적 담론이나 역사적 메시지를 담아야 할 이유는 없다. 또 소설이 역사적, 사회적 책무의 일부를 담당할 필요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작가 개인의 기질 문제일 뿐 논의 대상이 아니다.

 다만 영웅부재의 현대사회의 한 단면의 반영이건, 작가의 의도적 설정이건 우선덕의 세계 인식 속에 강렬한 도전과 의지, 투쟁력, 수컷의 냄새, 마초적 기질의 남성이 들어 설 자리가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가 14년의 물리적 시간이 흐르면서도 변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데뷔작 때부터 변하지 않은 그의 화자(話者) 설정과도 이것은 직접 관계를 가지고 있다. 작가와 화자, 화자와 담론 속 등장인물과의 거리(distance)로 설명이 되어지는  시점문제에서 그는 고집스럽게 1인칭 여성화자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 단편집이 출간되고 14년 후 출간된 소설집 ‘옛 로망스’(2003.12. 민음사)에는 다음 9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동행/이상한 나날/호수가 보이는 테라스의 나날/그 여자가 쓰는 소설의 나날

     /인도로 가는 길/소설가를 만난 날/너의 엄마/옛 로망스/월트를 기다리며/

 

  이 소설 들 중 남성이 작품구조 안에서 어느 정도 역할 담당이 주어지고  있는 작품은 수록작품 중 서술방법이 다른 ‘옛 로망스’를 제외하면 ‘동행’과 ‘그 여자가 쓰는 소설의 나날’, ‘월트를 기다리며’, 와 ‘호수가 보이는 테라스의 나날’, ‘너의 엄마’ 정도가 될 것이다. 


 이혼 후, 아이들과 사는 여성 화자가 애 아빠와 새 해를 같이 맞기 위해 서울을 출발, 강원도 바닷가 친구 콘도의 일박 여정을 다룬 ‘동행’에서는 헤어진 남편이 등장한다.

 그러나 만남, 결혼, 이혼의 과정이 여성 화자의 담담한 의식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서술방법 때문에 ‘남편’ 역시 사내 냄새가 나지 않는다. 한 때 사랑했고, 아이들을 둔 사이, 서로 다른 이성이 있는 것도 아닌 두 사람 사이의 이 담담한 관계는 애 아버지에게서 완전히 ‘남성’을 거세해 버리고 있다. 화자인 자신 역시 ‘여성성’이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공인된 휴가철이 아니면 절대로 휴가를 낼 사람이 아닌...남들과 비슷한 보조로 살아 가야한다는 지론의 애 아버지, 보편적으로 튀지 않게, 그의 상식 반대편에 서 있어서.....> 헤어졌지만 그들 사이에는 애증 같은 것도 없다. 그저 모든 게 담담하기만 한 잠시의 동행일 뿐이다..

 <휴게소가 보이면 예정에 없었어도 화장실을 가고, 다시 커피를 마시고 아이들을 호두과자를 사 먹었다. 양수리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갈비를 먹고 나오니 저녁이었다.>.....<수많은 동행이 있었다. 거리를 메우고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저 동행들, 어찌 무생물인 내 작은 차뿐이랴. 어찌 애들 아버지와 애들과 조카아이 뿐이랴. 내가 살아 숨 쉬는 동안 함께 숨을 쉬는,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하는 수천 수억의 동행 들....>속에 헤어진 남편도 잠시 동행의 관계일 뿐, 화자의 입장에서는 무생물인 작은 차나, 수천, 수억의 다른 동행과 전혀 다르지 않다.


 거기에 비해 <그 여자가 쓰는 소설의 나날>은 화자인 ‘영인’의 현실적인 친구이면서, 영인이 쓰고 있는 소설의 허구적 공간 속 여주인공인 ‘지윤’의 상대역으로 설정된 연하의 ‘상철’이라는 남자가 흥미롭게도 우선덕 소설에서는 드물게 부정적이지만 ‘수컷’ 냄새를 풍긴다.


   얘들아. 난 그것 안다. 난 안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돈 없는 두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게 뭐겠     니. 사랑의 무슨 달콤한 얘기. 인생을 탐구하는 깊은. 그런 얘기 나누겠니. 그런 때는 섹스밖에 없단    다. 내 전부를  집약해서 보여줄 수 있는 건 섹스밖에 없단다. 그게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그 말     천만 번보다 더한 거란다. 너희들 아니?

  영인도 지윤도 지금에서야 알았다. 창희의 한숨에 찬 강의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어서, 아 그렇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했다.

   그렇게 절절한 사랑을 해보는 게 내 인생 최대최고의 꿈이라는 것 아니니, 역시! 사랑은 금지된 사    랑을 해야 해. 금지된 사랑이 진짜야.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하는 게 진짜야. 얼마나 처절하니!    피가 뚝뚝 흐르지 않니? 신부나 중 같은 남자들을 겨냥해야 그런 사랑을 해보는 거야. 얘들아, 처절    한 사랑 말이다. 아, 사랑은 그렇게 피를 흘려야 해. 온 몸을, 가슴을 찢어발겨야 해. 갈가리, 갈가     리....

                                             (‘그 여자가 쓰는 소설의 나날’ 옛 로망스 p89)

  

 중년 여인들의 실존적 갈증과 외로움을 효과 있게 형상화한 이 작품 속의 사내 ‘상철’은 가정이 있으면서도 홀로된 친구 지윤에게 접근하여 상처를 입히는 부정적 character. 그러나 그 남자에게서는 모처럼 생명력이 느껴진다.

 실제 상황에서 보다  화자의 소설 속에서 더 자유롭게 유영하는 지윤의 행동반경과 그 대각선에 선 ‘상철’이라는 인물은 인상적이고 강렬하다.

 두 권 소설집을 통 털어서 남성 character로의 선명성이 가장 뚜렷한 ‘상철’이라는 인물에 대한 작가의 부정적 단안이 우선덕의 작가의식의 한 단락을 지워버리는 것일까.


  됐어. 벗고 있지. 이렇게 보니 당신 처녀처럼 젊고 예쁜데? 상철이 캔 꼭지를 따며 그녀를 바라보았    다. 안경에 늘 가려 있던 눈빛은 멀고멀었다. 내가 보여요? 지윤이 물었다. 상철이 대답하기 전에 그    다음도 물었다. 내가 당신의 무엇으로 보이나요? 우리는 무엇인가요? 상철은 신중하게 시간을 끌다    가 대답했다. 당신은 편한 여자야, 좋은 여자지.

  그녀 등줄기며 심장, 마음, 위장, 간이며 허파, 창자 전부를 날선 바람이 훑으며 지나갔다. 바람이란    마음 이쪽에서 저쪽으로 휘몰아 다니다가 마침내 그 몸을 터뜨리고 나가 대기를 이동시켜 세상의     바람이 되는지도 모른다. 그 바람의 날에 온몸이 에이였다.

  편하고 좋은 여자는 많단다. 알고 지내는 동안만이라도 너에게서 연인, 애인, 그 표현을 듣고 싶었     지. 나는 너에게 지극했는데...

                         (‘그 여자가 소설 쓰는 나날’ 옛 로망스 pp120-121)


   가로수로 서 있는 나무들. 작은 별 같은 알전구 불빛. 크리스마스이브를 방불케 하는.

   문명한 불빛이 주는 아름다움이 지윤을 쓸쓸하게 적신다. 이 거리는 만남과 열락의 거리인데 무슨     연유인가. 만남과 만남. 그 만남의 숫자와 맞먹는 이별 때문인지도. 라고 지윤은 생각한다. 위장된     적막에도 답이 있다. 컴컴한 휘장을 들추면 살만 탐하는 육욕의 밤 혹은 낮. 용트림으로 뭉개진 시    간이 보인다. 서로의 살갗을 핥고 빨고 물어뜯으며 우리는 외로워서라고 하는 무리들.

   상철은 노상 너무 외로워,를 연발했었다. 당신은 모르지. 나의 외로움을. 당신도 나도 외로운 한 마     리 들짐승 산짐승이야.

                       (‘그 여자가 소설 쓰는 나날’ 옛 로망스 p97)

                  

  결말이 예견된 남자와의 관계, 섹스를 통한 사랑이라는 이름의 허상을 작가는 의도적으로 외면해 온 것일까. 그 허무의 실체를 작가는 너무 일찍 알아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월트를 기다리며’에 등장하는 남자 ‘강석운’ 역시 가식과 배신의 이미지로 ‘그 여자가 쓰는 소설 쓰는 나날’속 ‘상철’의 변형이라는 것을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그녀는 창문을 닫아버린다. 완벽한 늪이 된다. 꿈은 없으리. 생명의 탄생 그 꿈틀거림을 믿지 않으     리. 기다릴 게 없으므로. 이 늪은 다른 늪이다. 몹시 답답하고 깜깜하다. 그녀는 숨는다. 어둠의 밑바    닥으로. 가스 렌지 밸브를 연다...............

  

  엄마 바보

  그녀는 그 앞을 지나며 아이들에게 항의한다.

  엄마는 도산데 왜 바보니 얘들아.

  바보 도사

                            (‘월트를 기다리며’ 옛 로망스 p342)


 저녁노을 때문에 ‘호수가 보이는 테라스의 나날’에서 스치고 지난 남자가 있지만 그 남자 역시 이름도 사건도 없는 잠시 안개 같이 흩어지는 존재일 뿐, 처음부터 우선덕에게 있어서 남자의 존재란 배경이나 안개, 그림자였을지도 모른다. 


 전혀 다른 각도의 캐릭터로 ‘너의 엄마’에는 두 형제가 등장한다.

 생모는 아니지만 생모보다 더 가까웠던 의붓어머니의 치매. 아내들 눈치 때문에 치매 노인을 서로 떠 넘겨야하는 두 형제의 모습은 희극을 넘어서서 눈물겹게 비극적이다.

 노인 때문에 집을 나간 형수, 그 치매 노인을 동생 집으로 업고 온 형님. 과거에 본처를 두고 총각 행세를 해서 결혼, 아버지가 데리고 들어 온 여인이 문제의 주인공. 그 두 여성 외에도 밖에 또 다른 두 여자와 살림을 차린 아버지를 통해 지난 시대 남성의 부정적 한 전형(type)과 함께 형제를 통해 이 시대 무력한 남성의 또 다른 전형을 이 소설을 보여준다.


 첫 소설집에서 그림자 같던 남성들은 14년이 지난 후 거세되어 식물화 되었거나, 잠깐 생동감을 보이다가 결국 허무를 확인시키는 배신의의 부정적 역할에 머문다.

 14년이라는 시간이 우선덕에게 준 변모랄까, 남자는 수컷, 혹은 섹스 머신으로 상상 속이라도 해도 대단히 단순화해진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유혹이나 로맨스가 배제된 건조하고 기계적인 남성상이 얼핏 ‘이상한 나날’에서 그 정체를 보인다. 


  그녀 생각은 여자, 남자로 축약되었다.

  여자와 남자는 뭐가 다른가. 어떤 의미가 있나. 섹스를 해결해주는 것 외에 남자가 어디에 더 소용    되나. 정신이 들어가 있지 않은 섹스를 해 보고 싶다고 영인은 생각한다. 영혼이니 사랑이니 질적이    지 말고. 오. 건조하게 섹스를 해결해 줄 남자만 있으면 되리. 길들이지 않아도 되는 뚝뚝 문을 열고    들어와 곧바로 서로를 안고 정사가 끝나면 벌떡 일어나 가버리는 남자.

                                                (‘이상한 나날’ 옛 로망스 p51)

 허무로 결말이 날 남성과의 로맨스 같은 것으로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는 이제 없는 것이다.


 2)모계사회로의 회귀와 건너뛰는 나이


 급격한 세계의 변모에 제3의 성문제가 제기 되는 현실이지만 아직 기본적 소설 캐릭터는 여전히 남성과 여성이다.

 우선덕 소설에서 앞서 추적해 본 남성 희귀성과 정체성 상실은 반비례로 여성 역할 확대일 수밖에 없다. 우선덕 소설은 여성의 눈으로 여성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데뷔작 ‘하얀 역류’에 등장했던 방탕과 순수가 기묘하게 조화를 이루던 여자는 그의 첫 소설집 ‘굿바이 정순씨’ 속에서 신기하게 청춘을 훌쩍 건너 뛰어 ‘어머니’와 ‘할머니’로 급격하게 노화(老化)를 보인다.

 세계를 보는 작가의식의 조숙성이었을까. 아니면 의도적인 건조한 시선의 거리 두기의 방법이었을까.

 ‘꽃’에서 사춘기를 보이던 젊은 여성의 모습은  ‘새’ 시리즈 3편과 ‘선택’과 ‘비누방울’에서 잠시 젊은 아내로 머물더니 그의 여자들은 갑자기 늙어버린다. 세대를 뛰어 넘어 여성보다 모성으로, 인생의 황혼으로 치달아 가 버린다.

 ‘실감기’의 20년 전 남편과 헤어진 ‘어머니’나 별거 중인 ‘彎月’의 ‘어머니’는 생리활동 끝난 모성적 여인들이다.

 그러나 무심하던 그 여인들이 위기의 순간, ‘실감기’와 ‘만월’에서 잊고 있었던 속 깊은 전통적 한국의 여인상 전형을 잠시 환기시켜준다.


  “이 바보야! 당신이 안 오길래 혹시나 해서 장모님한테 전화를 걸었어. 장모님이 말씀하셔서야 알았    다. 난 대단한 큰 일이라도 난 줄 알았어. 다짜고짜 울기부터 하시는데..아버님이 돌아 가실지도 모    른다고 말이야. 어찌나 통곡을 하시는지..지금 돌아가시면 안 된다. 할 일이 태산같이 많은 어른인데,    이제부터 그림도 좋아지고 있는데 벌써 가시면 안 된다고...”

  “엄마가...엄마가..그랬어요?"

                                       (‘실감기’ 굿바이 정순씨 P28)


  아버지의 죽음이 내겐 영화의 한 토막인양 남의 일로만 느껴졌다. 완성되지 못한 작품들이 무더기로    여기저기 즐비하게 늘어져 있는 그곳은 미완성 작품을 위한 전람회장 같았다. 아버지 앞에 있던 캔    버스는 아직 물감 한 방울 튀지 않은 희디흰 것이었다. 그제서야 어머니는 끓어오르는 가래침을 뱉    듯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나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울 것이라는 상상은 한번도 해본 적    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 울음은 내게 박혀오고 있었다. 찢기고 갈라지고 막히고 터지고 또 갈갈이     찢기며 내 심장 깊숙한 곳에 패어드는 것이었다.

                                         (‘彎月’ 굿바이 정순씨 P158)


 그러나 속 깊은 사랑을 보이던 그의 여자들은 ‘비법’의 ‘송 여사’나, 인생을 이미 달관 해 버린 듯한 ‘찔레꽃’의 ‘서 여사’, ‘작은 평화’의 ‘세레나 할머니’에 오면서 여성의 성적 체취를 완전히 버린다.

 ‘굿바이 정순씨’에 오면 생과 사의 엄숙한 존재론적 의미까지 부각되면서 ‘탈 여성성’의 한 전범을 보여 준다.

 여성 화자를 붙들고 있으면서도 우선덕은 유행처럼 번지던 젊은 여성의 섹스와 사랑을 어떻게 완전히 건너뛰며 외면해 왔을까. 유추이지만 젊은 열정과 고뇌는 방대한 장편에게 의도적으로 양도하고, 단편에서는 짐짓 인생을 관조해보는 그런 자세를 의도적으로 가져 본 것일까.

 혹은 비슷한 연령대의 여성 작가들의 에너지가 지나치게 성적 취향에 기울어지고 있는 것에 대한 냉소적 외면이었을까.

 담담한 시선으로 나이든 노년의 삶을 추적해가면서 그의 초기 단편들은 상당한 문학적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여진다. 동년배 작가들의 감상적 성적담론의 탐닉에 초연하게 거리를 두고 그는 담담한 시선으로 삶을 관조하면서 단단한 구도의 완성도 높은 단편을 창작한 것으로 평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청춘기를 생략한 채 그의 main charater들은 모계사회의 어머니로, 할머니로 변신하여 세상을 모성 속에서 싸안는다.  


 ‘옛 로망스’ 에 수록된 소설들은 ‘옛 로망스’ 1편과 ‘너의 엄마’를 제외한 7편의 작품이 모두 ‘주인공과 그 친구들’이라는 같은 구도의 인물 망(網)을 가진 연작 형태를 지니고 있다.

  아이 둘을 데리고 이혼하여 살고 있는 ‘영인’이라는 화자를 중심으로 주변 친구로 등장하는 ‘지윤’과 ‘창희’, ‘동근’, ‘순자’, 후배 정주, 옆집 여자....

‘월트를 기다리며’의 화가 ‘정상희’와 ‘소설가를 만난 날’에 등장하는 ‘우순둑’ 역시 같은 궤 위의 ‘영인’이라는 것은 쉽게 느껴진다.

 14년 시차를 지나면서 우선덕의 main character는 ‘굿바이 정순씨’에서 건너뛰었던  ‘중년 여인’의 자리로 되돌아 온 셈이다.

 건너뛰었던 ‘중년여성’이 작가적 연륜과 함께 현실적 리얼리티를 획득하면서 포근하고 일상적인 이웃으로 독자 곁에 돌아온 셈이다.

 ‘굿바이 정순씨’에서 감정의 격동을 추스르기 힘든 ‘중년나이’를 유보해 두었던 작가는 작가 자신과 동년배의 화자를 통해 삶이 결코 거창하지도, 만만한 것도 그렇다고 절망의 대상도 아니라는 확인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창 밖으로 보이는 비닐하우스 단지를 호수라고 생각하면서 풍족하지 못한 일상과 현실,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영인’은 현실과 생활을 껴안는다.


  “공연한 소리를 해서 미안 해.자기. 씩씩하게 잘 살고 있는데 커피 다 식어. 커피는 뜨거울 때 마셔   야지.”

 좁고 기다란 테라스에 노을 빛이 주황 기운을 띠고 노랗다. 그 빛에 빨간 의자의 동그란 판이 잘 익   은 열매처럼 더 붉고 단단해 보인다.

                                    (‘호수가 보이는 테라스의 나날’ 옛 로망스p76)

 

 인도 여행을 빌미로 화자 주변 친구들의 돈까지 사기를 해 간 후배 정주를 그대로 보내고도 버렸던 콩나물 찌꺼기에서 더 찾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영인’은 상상 속의 인도를 향해 편한 마음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오물 범벅이 된 ‘치매 엄마’에게 샤워기로 물을 뿌리는 ‘너의 엄마’ 속의 성재 아내도 주어진 삶 앞에 그것들을 싸안아 근원적 모성을 보인다. 


  그녀는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엄마를 끌어안고 그 품에 얼굴을 묻으며 비벼댔다. 그    녀는 오열을 참아내려 헉헉거리고 있었다. 고약한 악취와 더럽기만 한 오물도 상관없이 그녀는 결국    꺼억꺽 울음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어떻게 안 해? 어떻게 안 할 수 있어? 당신들 엄마잖아? 너의 엄마잖아? 그러니 어떻게 해? 어떻    게 하느냐 말이야!”

  샤워기는 호스 줄기를 뒤치며 따뜻한 물줄기를 연신 뻗쳐내고 있었다. 아주 작은 화장실 안이 수증    기로 가득 차 뽀얀 우윳빛으로 변해 갔다. 오물 범벅에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 아니 누구의 얼굴이    든 뜨거운 김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될 참이었다.   

                                                   (‘너의 엄마’ 옛 로망스 p216)


 낭만이나 꿈, 분노가 아니라 이제 앞에 놓인 것은 생활이고 현실인 것이다.

 한 층 높은 차원의 용서와 담담함, 그 중년의 모성적 포용, 거기에는 모계질서의  근원적 모성이 숨쉬고 있다.



 3.에필로그


  작가에게 변명이란 있을 수 없다고 대학 때의 은사께서는 준엄하게 말씀하셨다.

  작가 자신에 대해, 그 작품에 대해.

                     (굿바이 정순씨의 ‘작가의 말’에서)

 첫 소설집 ‘굿바이 정순씨’에 실린 짧은 ‘작가의 말’ 중에 실려 있는 부분이다.

 황순원 선생의 이 충고는 소설가의 자신에 대한 엄격성, 문학에 대한 진지함, 시류와 유행 앞에서 자존, 등에 대한 조언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선덕은 은사의 이 매서운 충고를 16년 후, 새 소설집 ‘옛 로망스’의 ‘작가의 말’에서 다시 반복해서 쓰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앞서 살펴 본 고집스러운 1인칭 여성화자의 고수(固守), 나이든 여성 화자의 선택 으로 그는 적어도 한때 문학이 투사를 자처하던 이상한 풍토나 유행처럼 정치 사회적 이슈의 프로파간다 노름에서 자유롭게 한 걸음 물러 서 있을 수 있게 했을 것이다.

 또한 화자의 노화(老化)를 통해 유행처럼 번지던 지겨운 성담론 탐닉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 것이다. 오직 소설가는 작품의 예술적 승화를 통해 보편적 감동으로 제 의견을 진술할 수밖에 없다는 숙명적 인식이 그를 자기 한계 속에 머물게 했을 것이라는 유추 역시 어렵지 않다.  

 

 작품 이외의 발언을 극도로 자제해 온 작가의 다음과 같은 짧은 고백은 그의 소설세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험악하여 살기 어렵다 해도 어느 구석엔가 있을 사람들의 따뜻한 숨결, 작은 온기를    찾아 그려내고 싶다. 그리하여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라는 희망을 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주고 싶   다.


 그의 두 소설집을 통독해 본 독자라면 작가의 이러한 고백이 무리 없이 진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믿어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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