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세계와 한국소설의 미래

                                     

                                                       -1999년 한국문인협회 해외문학심포지엄 발표주제 (자카르타)

 


프롤로그


얼마전 국내 T.V에서 특집으로 베트남 호치민시의 한국인 2세, 신 라이 따이한에 대한 실상과 우르과이 몬타비디오에 우리 원양 어선 어부들이 뿌려 놓은 꼬레아리또아의 현재를 방영한 적이 있었습니다.


베트남 전쟁 중 한국 군인들과 군속들이 뿌려 놓은 라이 따이한이 어른이 된 지금, 새로운 신 라이 따이한들이 이미 한국으로 도망가 버린 한국인 아버지의 사진을 들여다 보고 울먹이고 있고, 지구 반대편 우르과이 몬타비디오 항구에는 원양어선 선원이었던 한국인 남편과 아버지를 기다리는 꼬레아리또아들이 현지인들의 질시의 시선을 받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지난 6월 18일, 아프리카 북부 라스팔마스에는 달세나 한국 선 박 부두 입구에 대서양의 사나운 파도와 싸우며 조업하다 목숨을 잃은 한국 선원 위령탑이 세워졌습니다.


또한 현재 한국의 산업 현장에는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힘든 노동 현장에 제3세계의 수십만 산업 인력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땀을 흘리고 있고, 경제 회복의 기미와 함께 불법 체류자의 문제까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일부 몰지각한 한국의 관광객들에 의해, 홍콩이며, 필립핀, 마카오의 카지노 현장에 엄청난 국력을 낭비해가는 우울한 소식도 들립니다.


세계가 그만큼 좁아지고 속도가 붙어버린 셈이지요.

 


소설이 인간의 삶의 양식을 투영하는 것이라면, 또한 한국소설이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한국인의 삶과 무관하지 않는 것이라면, 이 지구화 시대 한국인의 활동 무대가 전 세계 곳곳으로 확장되고 있고, 한국이라는 땅위도 우리 민족만이 아닌 제3세계 사람들의 삶이 공존해 가고 있는데, 우리 소설의 무대는 서울의 골목길과 아파트 주변에서만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닌가, 또는 목가적 감상 속에 복고적 정서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회의가 들게 됩니다.


소설은 물론 허구의 세계이고, 작가의 상상력 속에 창조된 예술 공간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허구성 때문에 사실성(reality)의 확보는 소설가에게 운명적으로 삶의 현장에 대한 냉혹한 관찰력을 요구합니다.


지금 세계는 시시각각으로 좁아지고, 작가들의 취재 여행 역시 과거에 비길 바 없이 넓어지면서 한국 소설의 무대가 많이 확장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국인의 삶이 있는 곳이라면, 한국 국토 위에서 살아가는 제3세계의 사람들이 공존하는 것이라면 현재의 한국소설의 시야는 한 걸음 더 확장되어야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소박한 바램을 가져 봅니다.


오늘 이곳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 이런 모임을 갖는 자체가 우리 소설의 영역 확대해 대한 기대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한국 소설의 미래에 대한 생각을 밝히고자 합니다.



1. 소설의 미래와 한국소설의 현 주소


급격하게 변해가는 현재의 문화 패턴 속에서 앞으로 소설을 비롯한 전통적인 문자 예술이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인가.


또한 한국소설은 앞으로의 좌표 설정에서 어떤 점에 유의해야 되는가. 더구나 새로운 세기를 앞두고 있는 이 지구화 시대에 우리 소설의 무대가 현재처럼 아파트 골목길에서 커피깼으로, 개인의 유년의 기억 속으로만 침잠해 들어가도 괜찮은 것인가. 이러한 몇가지 되돌아 보아야 할 명제가 오늘의 해외 심포지엄에서의 관심이 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한 단답형의 대답이나 처방이 쉽게 있을 수 없겠지만 이러한 관심과 논의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앞으로 소설이 살아 남을 수 있을까. 예술 양식의 중심으로, 문자 예술의 중심의 위치에 과거와 같은 권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사실 어느 장소에서건 T.V 버튼 하나로 과거 소설이 찾이하고 있던 현실을 넘어서는 이야기의 세계에 이제 대중들은 상상력의 과정을 생략한 채 곧바로 접근이 가능해져 버린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T.V만이 아니라 비디오나, 컴퓨터의 키보드 하나로 금방 자극적인 폭력과 섹스의 화면에 접속이 가능한 세계에서 아직도 활자라는 매체를 통해 집중력과 상상력이 요구되는 소설 속에서 이야기를 찾아 들어가는 과거의 독자들을 우리는 이제 포기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편의주의에 길들여져 가는 현대인들이 키보드 하나로 금방 과거 소설이 지녔던 현실 너머의 세계로의 여행이 가능해진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고 이것은 점점 더 심화되어 갈 것입니다.

 


전통적 소설이 가졌던 오락적 기능이나, 사회적 교사로의 효율적 역할은 이미 현대소설로 넘어 오면서 끝나 버렸지만, 그러나 현재와 같이 지나치게 넘쳐나는 직설적이고 직접적 자극에 일부 독자들은 언젠가 도리어 식상해 가면서 이에 대한 심리적 반작용이 올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문학의 표현 매체인 언어 예술만이 갖는 상징성과 인간 본성의 유현한 상상력의 세계가 부박한 현대문명의 폭력과 섹스의 직설적 범람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부 독자들의 심성 속에 향수로 살아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학의 불안한 미래, 소설의 죽음에 대한 예감이 팽배해가고 있는 시점에서 오히려 소설의 확장 쪽을 꿈꾸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문학적 위기, 소설의 위상에 대한 불안이 가중될수록 우리들은 소설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확인해야할 필요가 더욱 증가되는 것이며, 그런 의미 오늘 이 자리의 제3세계와 한국소설의 미래에 대한 논의는 하나의 의의를 갖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소설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앞으로의 바람직한 방향은 어느 쪽인가를 점검해 보아야겠습니다.


새로운 세기를 눈앞에 둔 현 시점에서의 한국소설에 진단은 그 시각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일반론적 입장에서 필자의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독자에 대한 효용적 측면과 오락적 기능으로의 인식 위에서 출발된 춘원 이광수적 소설세계는 상당히 긴 시간 한국 소설의 한 축을 지탱해 왔습니다. 그러나 30년대, 이상(李箱)이라는 한 천재를 넘어 서면서, 언어미학적 예술품으로의 인식, 혹은 독립된 구조물로의 인식에까지 현대소설이 도달해 가는 동안 거의 반세기 가까운 시간이 걸린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50년대의 전쟁을 겪습니다.


전쟁이라는 외부적 충격은 소설이 그것을 생산해내는 외부 여건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는 한 예증을 보여줍니다. 전쟁의 상흔, 그 속에서의 인간 존재의 의미, 한계인식과 인간 혐오, 등 전후소설의 특징은 소설을 언어 구조물로의 인식 보다 삶에 대한 철학적 질문으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70년대, 80년대를 지나면서 우리 정치 사회의 굴절된 여건으로 인하여 소설은 대 사회적 관심과 발언을 계속해 나가는 하나의 흐름을 한 축으로 형성되어 갔습니다.


70년대, 80년대 소설의 관심이 지나치게 사회적 모순 구조 쪽에 편향되어 있지 않았는가에 대한 반성이 일게 된 것이 90년대라고 생각됩니다.


이 반성과 반작용이 현시점의 한국 소설의 얼굴입니다.


이것은 다매체의 오락적 기능의 분산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현재의 한국소설은 더 이상의 거대 서사담론의 위상을 포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소설을 통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추구하는 독자의 수효 역시 감소했겠지만 작가들 역시 소설을 통해 과거처럼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90년대에 들면서 소설은 규모가 작은 미시담론과 감성적 언어의 혼합물로 보입니다. 모든 작품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90년대에 들면서 소설의 중심 축이 유년의 작가 개인의 추억과 개인적 정서, 되돌아서 허무해진 80년대의 투쟁 후일담, 직장과 골목길의 자잘한 일상 들에다, 더러는 서구적 앙띠. 로망의 실험들과 더불어 전통적 소설의 영역에서 멀어져 가는 양상도 나타납니다.


물론 이것은 모든 작가, 모든 소설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의 현상임은 틀림 없습니다.


이러한 한국 소설의 현 주소 위에서 우리 소설의 미래를 위한 비약의 방법의 하나로 제3세계와의 관계가 논의되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2. 한국소설의 공간 문제


일반적으로 소설이 인간의 삶에 대한 가장 구체적 접근의 문학 양식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아울러 한국소설이 한국인의 삶의 공간과 시간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에도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등장 인물의 활동 무대로의 시간과 공간은 작가의 작품 의도에 따라 설정되는 것이지만 어차피 그 작가의 체험의 무대와 그것을 읽을 독자의 체험의 무대와 상관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 농촌 인구가 대부분을 찾이하던 시기의 현대소설 초창기의 작품 무대가 대부분 우리의 궁핍하던 농촌이나 어촌일 수밖에 없었고, 도시 빈민층로의 유입, 일부 농민들의 만주 유랑, 동경 유학생활의 경험등이 소설의 무대를 확대시켜 갔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70년대 산업화 시대의 후유증으로 제기된 인간성 상실과 고향이 사라져버린 실향의식, 남북 분단의 비극과 함께 이산 가족의 문제들이 소설화되면서 변화된 소설 배경 문제도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근대이후 한국인이 특히 제3세계 쪽에 삶의 공간이 확대된 것은 일제 강점기의 징용에 의한 남양군도로의 진출과 하와이와 멕시코로의 노동이민일 것입니다.


그후 미국 이민이 늘어가면서 현지 1세들이 한국을 무대로 한 작품들이 현지에서 상당한 평가를 받기도 했고, 국내작가들의 빈번한 미국 방문이 그쪽을 무대로 한 소설들을 쓰기도 했으며, 그곳을 무대로 한 현지 교포 작가들의 작품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동남아 쪽에 대한 소설적 배경으로의 관심은 아무래도 2차 대전과 무관하지 않으며, 그후 베트남 파병과 더불어 이국적 배경과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이 우리 소설 속에 이입되어 간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래도 이 경우 195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이병구의 단편 <후조의 마음>은 중요한 작품으로 기념되리라는 생각입니다.


일본의 패전과 더불어 필립핀 고산지역에 전쟁이 끝난 줄도 모르고 다가로구 토착민 처녀 쎄리마와의 애욕과 조국 사이에 갈등하는 학병출신 김동수를 주인공으로 다룬 이 소설은 강렬한 이국정취를 배경으로, 살아서는 마을을 떠날 수 없는 토속 마을의 금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자를 죽여, 그 시체를 껴안고 고국을 향하는 엑조티즘을 볼 수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동경 유학생으로 열대식물학을 전공하던 주인공이 학병으로 끌려와 남양군도에서 군량미 생산에 투입된 뒤 현지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가 중국으로 탈출, 귀국과 더불어 다시 이데오르기의 희생이 되고, 그의 자식까지 월남전 참전으로 연결되는 민족 비극사의 한 장을 대하소설로 발표한 정현웅의 <전쟁과 사랑>( 1991, 해냄출판사)이 아마 본격적으로 동남아를 소설 배경으로 담은 소설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2차대전의 종전, 인도네시아를 배경으로 포로가 된 한국인 학병을 다룬 유금호의 <혀>(1977, 월간문학), 이국 취향적 분위기의 이병주의 <알렉산드리아>(1956, 세대)나, <마술사>( 1968, 현대문학) 등 소수의 작품만이 제3세계를 배경으로 보이다가, 베트남 전쟁의 발발과 한국군의 참전을 체험하면서 베트남이라는 공간과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이 맞 물리면서 상당한 양의 소설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황석영의 '탑'(1970, 조선일보), '무기의 그늘'(1985, 형성사)에 이어 박영한의 장편소설 '머나먼 쏭바강'(1978, 민음사, 1986, 중앙일보사)이나, 이상문의 '황색인'(1987, 한국문학사)등이 본격적으로 베트남에 진출했던 젊은이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확장된 삶의 공간 에 우리 소설이 뒤따라 가지 못했음은 확실합니다.

 

1954년 2월 24일, 휴전과 더불어 남북의 포로 교환이 되었을 때 남과 북,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고 제3국을 선택하여 조국을 떠난 76인의 반공 포로들이 인도의 남단 마드리스 항에 도착했습니다. 이 한국판 25시의 주인공76인은 최인훈의 <광장>에서 조국을 떠나는 한 인물의 고뇌로 한국 소설에 단 한번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뿐, 그것을 끝으로, 한국 소설에서 누구에게도 다루어지지도 않았고, 또 일반인의 기억 속에서도 사라졌습니다.


한 젊은 PD의 집념으로 지난 94년, 그들 76인의 그후 파란만장한 행적을 MBC T.V에서 일부 추적 보도한 바 있습니다. 일부는 삶의 터전을 이룬 사람도 있었지만, 여전히 이방인으로, 인도에서, 나머지는 조국과 지구 반대편인 남미로 흩어져, 정신병원에서, 혹은 살인자로 수감되어 있는 가슴 아픈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 기억의 뒤편에 묻혀버린 민족사의 비극적 단면이 가슴에 뭉클하게 남아 있습니다만 아직 소설로 그들이 떠돌던 공간과 고뇌가 쓰여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제 우리 작가들은 좀더 소명의식을 가지고 한국인의 삶의 무대를 폭 넓게 살펴보고 관심을 확대시켜가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서두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만 호치민시의 신 라이따이한이나, 우루과이 몬타비디오 항구에서 한국인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는 꼬레아리또아 들 역시 부끄러움이지만 우리 한국인 삶의 한 면입니다.


소설가들은 일종 소명 의식 속에 세계로 확장되어가는 한국인의 삶에 대한 추적이 필요 할 때입니다.



3. 한국소설의 미래

 

문학이, 또 소설이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글을 쓰는 것을 포기할 수 없는 이상, 문학에 대한, 소설에 대한 열정과 탈출구의 모색은 더욱 배가되어야 합니다.


한국소설이 세계 무대 위에서 제 역할을 찾기 위해서는 <가장 민족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명제를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일입니다만, 여기에 한국 소설의 배경 확장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의 우리 소설들이 지나치게 미시담론이 영역 속에 스스로 시선을 내부로 돌리고 있는 것은 나름대로의 한 흐름입니다만 예술은 늘 새로운 반역에 의해서만 발전해 갑니다. 한쪽이 수직적 세계의 심화에 몰두해 가는 동안 또 다른 작가들에 의해서는 수평적 세계의 확산과 거대 담론으로의 비약이 요구됩니다.


다른 영역에서 침해할 수 없는 무한한 상상력의 공간, 독자로 하여금 삶의 깊이에 도달하는 사색의 영역을 제공하는 것은 소설의 새로운 자리매김을 위한 노력을 더 해 갑시다.


서두에 부정적 한국인의 이그러진 초상을 소개했습니다만, 긍정적 의미에서도 지금 세계의 어느 곳이건 한국인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산업의 역군으로, 의술로, 봉사로, 열심히 고국의 혼을 심어 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작가들 역시 취재를 위해 세계 곳곳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이제 소설의 무대가 넓어져야하고 작가들의 시선 역시 확대되어야합니다.


이제 제3세계가 한국 소설의 공간적 배경으로 더 많이 채용되어 한국 소설의 영토가 확장될 것을 기대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1999.7. 29. 자카르타 MULIA HOT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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