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는 연구실을 꿈꾸며

 

 

  강의실 복도에서도 담당 교수가 아니면 학생들은 요사이 거의 목례를 하지 않는다. 직접 수강 받는 교수 앞이 아니면 피우던 담배를 잠시 뒤로 감추는 시늉마저 별로 하지 않는다.

 졸업이 가까워지는 사은회의 자리에 이제 교수들도 핑계만 있으면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으려는 궁리를 슬슬 한다. 4년을 마치고 학사가 되어 세상에 나가는 제자들과의 그 석별의 자리에 제자들이 사회에 나가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말을 할 자신도 없고, 학생들이 한 사람 전문가로 사회에 곧바로 적응하도록 가르치지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이다.

 왜 이렇게 되어 가는 것일까.

 신문의 한 쪽 귀퉁이에는 재임용 탈락교수 이야기가 실린다. 사립학교 집행부에 요새 거친 말로 찍혀서 그렇게 되었다는 피해자의 변명이 곁들이고, 그 부당함을 항의하는 성명서가 교수휴게실에 나뒹굴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교수들에게 언제부터인지 교수 노릇이 영 신통치 않는 것 같은 회의가 온다.

 한때 선비들은 정신적 자존심만으로도 묵묵히 책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뀐 것이다. 모든 것이 배금의 잣대로 통용되는 사회 구조 속에서 우선 교수들은 스스로 상대적 빈곤감을 는낀다.

 거기에 시장논리와 배금적 가치관이 자리잡은 이 시대는 학생들 역시 자기 집 보다 경제적으로 못사는 교수를 마음속으로 비웃는다. 근대화의 과정, 부모들의 보상심리 속에 아이들은 유치원 시절부터 격심한 경쟁논리와 이기심으로 자라왔고, 그 아이들은 대학생이 된 지금, 대학 역시 그들에게는 출세의 한 과정일 뿐이다.  (교수신문 200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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